서얼차별과 허통운동
- 최초 등록일
- 2010.07.02
- 최종 저작일
- 2010.05
- 5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000원
소개글
한국중세사2 (조선사) 에 대한 강의를 들으면서
발제자료로 만든 거예요.
한국사에 대한 각종 서적들을 찾았구요,
전문책은 한자가 많아 어려웠는데, 한자 다 찾아가면서 읽었습니다.
서얼금고와 허통운동에 대해서는
이 리포트 하나면 충분하구요,
중요부분으로 자세히 다루었습니다.
모두들 에이쁠 !!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서얼 인구의 증가
2) 서얼의 정치∙경제적 지위향상과 사회참여
3) 서얼통청운동의 확대
Ⅲ. 결론
본문내용
Ⅰ. 서론
서얼은 사족의 혈통을 받았으면서도 모계가 正妻가 아닌 첩이었기 때문에 사족으로서의 지위를 누리지 못하는 존재였다. 庶는 양첩의 자손을, 蘖은 천첩의 자손을 뜻하는 것이다.
서얼차대가 관념적·법제적으로 강화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의 일이다. 고려시대에 婢妾소생의 신분 귀속이 賤者隨母法에 따르게 됨으로써 차대되기는 했지만 그 정도는 비교적 약하였다. 그러나 조선왕조의 성립과 함께 유학사상이 국가의 지도이념이 되고 사대부관료들에 의해 지배신분의 양분화가 이루어지면서 서얼에 대한 차대가 엄격해지게 되었다.
다처제와 축첩제의 풍습은 여말 선초에도 여전하였다. 이러한 혼인풍습의 부조화는 재산상속과 관련하여 다처간 또는 처첩간에 爭嫡相訟을 자주 유발시킴으로써 사회문제화 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재산상속권에서 제외된 첩이 상속재산을 차지하고자 처라고 주장하는 현상이 자주 나타나 嫡·庶의 분간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사회분위기 속에서 첩에 대한 제재가 불가피해지게 됨으로써 처·첩의 분간이 필요하게 되었다. 또한 개국 초에 유고적인 사회윤리를 보급시키는 과정에서 당시의 혼인형태를 ⌜禮無二嫡⌟이라는 유교적 명분론에 맞게 개편하기 위해서도 처·첩의 분간이 필요하였다. 이에 따라 태종 14년(1414)에 처첩분간법이 제정되어 첩에 대한 차별이 심해지게 되었다. 이와 함께 적자와 서얼의 차별을 엄격히 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첩이 천신분과 아주 가까운 신분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신분이 천한 첩의 소생은 당시의 천자수모법이 적용되는 풍습 하에서 천 이상의 신분이 될 수 없었다. 이러한 천자수모의 풍습과 정신에다 조선 초기의 유교적 예교화운동의 진전과 함께 적서의 구분을 엄격히 하려는 새로운 사조가 복합됨으로써 서얼이 차별대우를 받게 되고, 나아가서는 서얼금고 단행의 사상적인 기초가 되었다.
Ⅱ. 본론
천자수모라는 관념에 사로잡힌 사대부관료들은 첩의 자손에 대한 끊임없는 제재를 가했다. 태종 때 서얼에게 서얼금고의 규제를 가하였는데, 즉 서얼과 그 자손이 생원·진사시와 문·무과에 응시하는 것을 불허하였다. 이 규정이 ⟪경국대전⟫에 명시되어 있다. 그런데 곧 이어 서얼자손이 서얼의 자손들 역시 영원히 금고되게 하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