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인물에 대한 역사조사 중 기황후 입니다.
목차
1. 들어가며 : 인물 선정 이유
2. 기황후의 기본 정보
3. 기황후의 생애
1) 공녀로 보내지기까지
2) 공녀에서 황후로
3) 황후가 되기까지의 시련
4) 기황후의 영향력
5) 원의 몰락과 그 이후
6) 기황후의 최후에 대한 가설
4. 기황후에 대한 잘못된 인식
1) 드라마에서의 왜곡
2) 왜곡의 원인
5. 기황후에 대한 평가
1) 부정적 평가
- 그녀의 친인척, 기철
- 공민왕과 당시의 고려 정세
2) 긍정적 평가
6. 맺으며 : 우리가 평가하는 기황후
<참고문헌>
본문내용
1. 들어가며 : 인물 선정 이유
최근 MBC에서는 드라마 <신돈>을 방영 중이다. 그런데 주인공인 신돈과 공민왕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는 인물이 있으니 그가 바로 원 순제의 부인, ‘기황후’ 이다.
기황후는 드라마 속에서 시종일관 화려한 차림과 퇴폐적인 모습으로 시청자들의 시각을 자극한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흥미를 위주로 하는 드라마의 영역에서 재창조된 가공의 인물일 뿐, 대제국 원의 국모였던 기황후에게 걸맞는 설정이 아니다. 사람들에게 파급효과가 큰 드라마를 통해 역사적으로 조명되지 않았던 기황후의 모습이 새삼 주목받고 있으나, 그 방식이 어긋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에서의 기황후의 행적과, 그녀가 우리나라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 객관적인 평가가 내려져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조사․발표할 여성 인물로 기황후를 선정하였다.
2. 기황후의 기본 정보
원(元)나라 순제의 제 2 황후. 고려 기자오의 딸로 몽골 이름은 완자홀도(完者忽都)이다. 몽골에 들어가 1333년 고려 사람인 내시 고용보(高龍普)의 힘으로 원 황실의 궁녀로 있었는데 순제의 총애를 받아 몽골인 이외에는 황후로 삼지 말라는 규칙을 깨뜨리고 제 2황후로 책봉되었다. 39년 황태자 아유시다리를 낳아 원 황실의 황통(皇統)을 잇게한 것을 비롯하여 당시 기황후의 세력은 원나라 말 30년간 원실에서 융성하였으며 실권을 장악하였으며, 그 영향력은 고려에까지 미쳐 그의 친척들은 영화와 권세를 누리며 횡포를 부렸다. 65년 정후가 되었으며, 다음해 주원장(朱元璋)이 연경(燕京)을 함락시키자 몽골내륙으로 쫓겨났다.
3. 기황후의 생애
1) 공녀로 보내지기까지
몽고가 고려를 처음 침입한 것은 고종 18년(1231)이다. 그 후 몽고는 30여 년에 걸쳐 무려 일곱 차례나 침입했다. 그때마다 고려는 치열한 항전을 벌인다. 그러나 고려는 몽고에 무릎을 꿇고 만다. (고종 46년) 이때부터 고려에는 원나라의 공주가 왕비로 오는 것을 비롯해서 다양한 형태의 내정간섭이 시작된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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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연구회,「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청년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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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서,「고려사절요」
http://koreandb.kdaq.empas.com
http://www.ohmynews.com
http://www.imbc.com/broad/tv/drama/sindon/index.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