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사변에 관한 고찰
- 최초 등록일
- 2009.12.07
- 최종 저작일
- 20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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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을미사변에 관한 고찰
목차
●을미사변
●준비과정
●진행과정
●사후처리
●장례
●평가
본문내용
●평가
고종은 사건 이전에 명성황후의 신변을 염려하여 여러 조치를 취한다. 시위대를 만들었으며, 그것으로도 안심이 되지 않아 서양인 궁궐 경비원을 고용하였다. 그러나 러시아인 경비원 세레딘사바틴은 폭동이 있으리라는 정보를 중국인으로부터 받고도 방어 대책을 건의하거나 세우지 않아 고종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또한 시위대와 궁궐 경비원들은 사건 당일에도 새벽 2시에 이미 일본군의 수상한 동태를 파악했으나 안이하게 경비하다가 4시 30분경에야 고종에게 급보를 전했다. 고종은 왕후가 안전한 곳에 피신했다고 답변했으나 당시의 급박한 정황으로 보아 마땅한 피신처를 찾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했으리라 여겨진다.
당시 고종은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처럼 왕의 침전만은 감히 침범하지 못하리라는 예상하고 왕후를 침전인 옥호루에서 고종의 침전인 곤령합으로 부르고,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아 왕후를 일반 궁녀와 같은 복장으로 궁녀들과 함께 앉혀 폭도들의 눈을 피하려는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일본인 폭도들은 곤령합마저 서슴없이 유린하였다.
한편 봉건 군주 국가에서 마땅히 조선의 군대는 왕실 수호와 국토 방위에 헌신해야 함에도 조선 군대인 훈련대 일부는 일본 폭도들의 역모에 가담해 그들의 졸개로 궁궐 침입에 가세했다. 한편 연약한 조선 궁녀들은 일본 폭도들의 폭력과 협박 앞에 굴복하지 않았으나 1500명의 궁궐 경비병은 겁을 먹고 무기와 군복 상의를 벗어던지고 도주해 버렸다.
(1)역사적 평가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이 사건을 고종이 아관파천을 결정하게 된 주요 원인으로 보며, 또한 의병 봉기의 계기가 되었다고 여긴다. 또한 대한제국 성립의 한 원인으로 평가한다.
한국의 친일파나 일본의 극우 인사들은 한국의 근대화를 방해하는 “민비”를 처단함으로써 한국의 근대화를 촉진하였다고 주장한다. 반면 그와 같은 주장에 대해 서구화만을 근대화로 오해하여 자주적 근대화를 수구·반동으로 여겨서 일으킨 폭거라는 시각도 존재한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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