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와 류큐왕국
- 최초 등록일
- 2009.12.04
- 최종 저작일
- 20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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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류큐왕국이 오키나와로 편입되는 과정과
일본 편입이후 오키나와가 겪게되는 고통과 슬픔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타자들의 시선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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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일본 열도의 남쪽 끄트머리엔 15세기를 전후하여 아시아지역에 널리 이름을 떨친 작은 섬나라가 있었다. 이 나라는 비록 군사력은 미약했지만 조선, 중국, 일본, 동남아 각 국의 한 가운데 위치한 지리적 이점을 바탕으로 당시 해상 무역 네트워크의 허브역할을 수행해 냄과 동시에 중국과 일본간의 해상세력다툼의 완충지대로서 그 위치를 공고히 하였다. 류큐왕국이 당시 중국의 책봉조공제도에 입공한 것은 1372년으로 1401년에 입공한 일본보다도 앞서있는 것이었다. 당시 중국의 책봉조공제도는 중국 주변의 왕조가 ‘하나의 독립된 권력으로서 응집력과 안정성을 가질수록’ 확실히 편입되는 특성을 가진 제도로 당시 동아시아지역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던 중국에게 류큐가 하나의 세력으로 당당히 인정받았다는 증거이다. 이후 1609년 일본의 사쓰마 번에게 점령당하여 류큐번으로 일본에 편입되지만 이후에도 중국과 일본의 중간자로서의 위치를 잃지 않고 번영을 누렸다.
해상왕국 류큐에 비극이 닥친 것은 1879년이었다. 1872년부터 단계적으로 류큐왕국의 권한을 빼앗아 온 일본 정부가 내무대승인 마쓰다 미치유키(松田道之)와 관리들 그리고 160명의 경찰과 300명의 군사를 보내어 류큐왕국의 일체를 접수하고 류큐를 오키나와현으로 개명시킨 것이다. 결국 일본에 완전히 흡수된 오키나와는 더 큰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흡수 이후 이어진 수탈도 모자라서 세계 2차 대전을 거치면서 일본에서 가장 치열한 전장중 하나로 내몰려 전 인구의 4분의 1을 잃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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