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중 작가론
- 최초 등록일
- 2009.11.20
- 최종 저작일
- 20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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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김만중의 작가론입니다.
목차
1. 김만중의 일생
2. 김만중의 문학관
3. 김만중의 인식론
본문내용
1. 김만중의 일생
서포 김만중은 인조 15년인 1637년에 병자호란의 굴욕을 견디다 못하여 강화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김익겸의 유박자로 태어났다. 서포는 그 사건이 있은 지 한 달이 지난 후에 이 세상에 태어났다. 이러한 난리 속에서 유복자로 태어난 서포는, 부친의 얼굴조차 보지 못했음을 평생의 한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모친 윤씨는 부친을 대신하여 자식을 헌신적으로 기르고 가르쳤다. 서포의 유년 시절은 병자호란을 치른 후이기에 서책이 많이 불타 버려 책을 구하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그러나 윤씨는 궁핍한 속에서도 눈에 뜨이는 대로 <맹자>,<중용>과 같은 책을 곡식을 퍼주고 바꿨으며, 자식들에게 필요한 책이 눈에 띄면 책값을 따지지 않고 구해 주는 현명한 어머니였다. 김만중은 남들과 달리 영특한 재주를 타고 났기에, 14세에 문리가 통하였고, 16세 되는 효종 3년에는 진사시험에 합격하였다. 29세가 되는 현종 6년에는 정시 갑과에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정시의 갑과 합격으로 성균관 전적을 맡은 후로부터 그의 벼슬생활은 시작되었다. 그때의 나이 29세였는데, 다음 해에는 정언, 사서를 역임하였고 그 이듬해에는 지평을 거처 수찬에 올랐다. 32세 때인 현종 9년 3월에는 대신이 행리에 있을 때에 중사를 특별히 보내어 불러오게 하는 것에 반대하고 승지나 사관을 보내어도 충분하다고 주장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샀다. 이후 그의 강직한 성품과 과격한 언사는 숙종의 비위를 자주 거슬러, 39세가 되는 숙종 원년 윤 5월 26일에는 파직을 당하였다. 그는 설상가상으로 27일에는 관직을 삭탈 당했을 뿐만 아니라 김자 성을 쓰지 못하게 되는 벌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43세 되는 숙종 5년에 삭탈 당했던 관직을 다시 되찾고 공조판서, 대사헌, 우참찬, 예조판서, 좌참찬, 의금부 판사 등을 역임하다가 현종 14년 9월에 허적이 영상 될 자격이 없음을 논하여 유배를 당하게 된다.
참고 자료
본문내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