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산서원
- 최초 등록일
- 2009.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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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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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병산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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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본래 이 서원의 전신은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당(豊岳書堂)으로 고려 때부터 사림의 교육기관이었다.
1572년(선조5)에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선생이 지금의 병산으로 옮긴 것이다.
1607년 서애가 타계하자 정경세(鄭經世) 등 지방 유림의 공의로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1613년(광해군5)에 존덕사(尊德祠)를 창건하고 위패를 봉안하였다.
1614년 병산서원으로 개칭하였다.
1620년(광해군12)에 유림의 공론에 따라 퇴계 선생을 모시는 여강서원(廬江書院)으로 위패를 옮기게 되었다.
그 뒤 1629년(인조9)에 별도의 위패를 마련하여 존덕사에 모셨으며, 그의 셋째 아들 수암(修巖) 류진(柳袗)을
추가 배향하였다.
1863년(철종14)에 사액(賜額)되어 서원으로 승격하였다.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으며, 1868년(고종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내렸을 때에도 훼철(毁撤)되지 않고 보호되었다. 일제강점기에 대대적인 보수가 행해졌으며 강당은 1921년에,
사당은 1937년 각각 다시 지어졌다. 매년 3월 중정(中丁:두 번째 丁日)과 9월 중정에 향사례를 지내고 있다.
사적 제 26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서애 선생의 문집을 비롯하여 각종 문헌 1,000여 종 3,000여 책이소장되어 있다.
서원소개 -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과 더불어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수제자로 수학하였고, 24세에 벼슬길에 올라 승문원, 예문관,
춘추관 등 주로 학예직 공무원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뛰어난 학문과 공정무사한 정치적 역량으로 당시 임금인 선조에게
발탁되어 40세 때 도승지(비서실장)를 거쳐 49세 때 우의정(부총리)로
등극하였고, 이조판서 (내무장관)까지 겸임하게 되었다.
1590년, 임진왜란을 이태 앞 둔 해였다.
당시 무명의 지방 무신이었던 두 사람을 발탁하여 요직에 앉혔으니,
바로 권율(權慄)과 이순신(李舜臣) 이다.
곧이어 발발한 임진왜란의 정국과 전쟁 수행의 막중한 임무를
감당하는 이는 서애를 포함한 이 세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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