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8세기 청나라의 사회, 문화 속에서 살아간 가상인물의 전기
- 최초 등록일
- 2009.08.05
- 최종 저작일
- 20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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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17~18세기 청나라를 배경으로 그 속에서 살았던 가상의 인물을 설정하여 전기를 쓴 것입니다. 다양한 참고문헌을 바탕으로 당시의 사회와 문화상을 최대한 반영하려고 노력했으며 인물 자체의 생애보다는 그를 둘러싼 사회의 모습에 초점을 둔 보고서입니다.
목차
첨진중의 출생과 배경
이발소로 번창한 담배 애호가 첨진중
산으로 들어가 붕민이 된 첨진중
광주로 간 첨진중의 말년
본문내용
첨진중의 출생과 배경
첨진중(詹眞重)는 청나라 사람이다. 그의 조상은 대대로 중국 남부 복건성(福建省) 하문(廈門)에서 남양 무역에 종사하던 사람이었다고 전해진다. 루손(마닐라)지방과의 잦은 교역으로 신식 대포기술을 익혔던 첨진중의 고조부는 후금의 누르하치를 맞아 싸우기 위해 신식대포와 함께 기술자로서 북쪽으로 올라가 영원성 전투를 치렀다. 그 후 명조가 망하고 청조가 들어서면서 직례성(直隸省) 순천부(順天府), 즉 북경 주변에서 농사를 짓는다던 친척집에 머물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7세기 중엽에 찾아온 전국적인 기근에 허덕이게 되고, 그에 더하여 팔기군에게 줄 땅을 위해 북경 주변의 한족 토지를 몰수하면서 첨진중의 선조들은 남쪽으로, 남쪽으로 계속 이주하게 된다.
결국 양자강 하류지역인 강소성(江蘇省) 남부, 남경 근처에 정착게 되는데, 양자강 하류지역은 청대 중국의 가장 도시화되고 가장 인구가 밀집된 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중국인들이 ‘양자강 남쪽’을 의미하는 강남지역이라고 전통적으로 지칭하는 지역의 중심부였다. 만주족 정복에 대한 저항 때문에 1645년 양주, 강음, 가정에 진군한 팔기인들에 의해 대학살이 자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선진지역이었던 양자강 하류지방은 17세기 후엽 급속하게 회복되었다. 양자강 평원의 평평한 대지는 수리농업에 이상적이었다. 델타지대는 수송비가 저렴하며 북으로는 대운하로, 서쪽으로는 양자강으로, 그리고 동쪽의 해안과 국외로는 바다에 의해 연결되어있는 밀집된 수로망으로 뒤덮여 있었다. 양자강 하류지역의 서부 산악지대와 남부 변두리 지역조차도 다른 지역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발달된 곳이었으며, 안휘 남부의 산악지대는 전국적으로 유명했던 휘주상인들의 출신 지역이었다. 그러나 18세기 내내 붕민들이 양자강 고지대에 정착하여 넓은 지역의 남벌, 토양침식과 델타지역의 홍수피해를 유발하였다.
참고 자료
[18세기 중국사회], 수잔 나퀸 · 이블린 S. 로스키, 신서원, 1998
[조선과 중국 근세 오백년을 가다], 기시모토 미오 · 미야지마 히로시, 역사비평사, 2003
[중국을 말한다 14. 석양의 노을], 멍펑싱, 신원문화사, 2008
18세기 中國社會의 吸煙文化 硏究, 元廷植,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