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조선 후기 임술 민란
목차
1. 머리말
2. 임술민란의 발생원인
3. 임술민란의 전개과정
4. 항쟁집단의 조직
5. 봉건정부의 대책
6. 맺음말
본문내용
조선후기에 들어와 경제생활의 급격한 변화로 농민의 계층이 분화하고, 양반의 몰락으로 신분체제가 붕괴됨으로써 전통사회의 기본질서가 무너져 민심은 정부로부터 멀어져 갔다. 더욱이 19세기 이후 계속된 외척의 세도정치로, 관리들이 부패하여 삼정(三政)이 문란해짐에 따라 농촌과 국가재정은 극도로 피폐하여 더 이상 지탱하기가 힘들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862년 철종 13년 새로 부임한 진주 병사(兵使) 백낙신이 백성들에게 가혹한 탄압과 착취를 일삼자, 양반 출신의 농민인 유계춘 등이 난을 일으켜 관아를 습격하고 환곡을 불태우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를 시작으로 농민들의 불만은 전국적으로 폭발하게 되는데, 임술년(壬戌年)에 일어났다고 하여 ‘임술농민항쟁’ 이라고 한다.
임술농민항쟁은 경상도 지역 20개 읍, 전라도 지역 37개 읍, 충청도 지역 12개 읍, 이외에도 함경도 함흥, 황해도 해주, 경기도 광주 등 모두 72개 군현에서 일어났는데, 이처럼 3남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전국으로 번져갔던 농민항쟁은 일부지역을 제외하고는 통일적인 전국적 지도부의 지도하여 전개되지 못하고 군현 단위의 고립 ․ 분산적 투쟁에 그쳤기 때문에 농민 항쟁의 발생 원인이나 항쟁전개과정, 항쟁주체 등 지역에 따라 일정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개별 사례보다는 이 시기 농민항쟁을 관통하는 일반성을 추출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2. 임술농민항쟁의 발생원인
임술농민항쟁은 봉건사회 해체기 사회모순이 전면화되는 상황에서 발생하였다. 우선 농업 생산력이 발달하고 상품화폐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농민층 분해가 급속히 촉진되었다. 그 결과 생산력에 발달에 따른 양극분해현상은 토지소유의 분화를 더욱 촉진시켰다. 이와 동시에 토지와 노동력의 상품화가 이루어지면서 이를 활용한 지주 ․ 부민(富民)들의 경영확대가 있었고 결국 농민층 분해로 인해 향촌 내 빈부의 격차가 심화되었고, 소농경영의 영세화와 자영농민층의 몰락현상이 두드러졌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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