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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정보
ㆍ발행기관 : 한국보훈학회
ㆍ수록지정보 : 한국보훈논총 / 5권 / 2호
ㆍ저자명 : 유준기
ㆍ저자명 : 유준기
목차
요약Ⅰ. 머리말
Ⅱ. 생애와 독립사상의 형성
Ⅲ. 초기 민족운동: 독립협회활동
Ⅳ. 3 · 1운동과 이상재의 활동
Ⅴ. 3 · 1운동 이후의 민족운동
Ⅵ. 맺음말
참고문헌
영문초록(Abstract)
한국어 초록
이상재의 삶을 밑받침한 기본가치는 시민을 위한 시민의 조직화에 설정되어 있었다. 그는 근대사회의 초두에서부터 시민을 조직화하고, 시민의 활동 기반을 확충해 나감으로써, 궁극적으로 시민의 사회적 지위를 고양시키고, 시민의 역량을 우리나라 근대사회 발전의 동력으로 활용코자 한 인물이었다.시민계급의 구축과 성장을 위해 그가 주목한 것은 교육과 종교였다. 그는 청년을 교육시켜 이들로 하여금 새로운 민족의 미래를 준비하고 열어나가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모든 기성세대가 청년을 뒷받침해야 하며, 기성세대 역시 노인이라는 생물학적 사고를 뛰어넘고, 노년의 청년이 되어야하며, 진취적인 자세로 열정을 갖고 일제와 봉건적 속박을 벗어나 자주적인 민족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YMCA를 통하여 한국청년들에게 근대의식을 심어줄 수 있는 공동체적 유기체로서의 이상적 공간으로 인식하였다. 그는 YMCA 사상을 구현하는 것이 구국의 첩경임을 확신하고 YMCA 발전에 진력한 결과 YMCA를 기독교교육뿐만 아니라 ‘민족의 이상적 교육기관’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일제 식민지배라는 민족의 수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근대지식을 길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에 의하면, 지식을 계발하는 일은 곧 농상공 · 화학 · 천문 등 근대과학지식을 깨우치는 일이었고, 이를 통해 비로소 학술의 발달도 기대할 수 있고, 사회와 국가의 수난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이었다.
이와 같은 그의 애국관, 시국관은 3 · 1운동에도 그대로 적요되었다. 그는 일본 도쿄의 한국 YMCA에서 행한 ‘2 · 8독립선언’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모색하였다.
그리하여 이종일과 접촉을 통하여 초창기부터 3 · 1운동에 참여하였으나 민족대표는 사양하였다. 그는 박희도 · 이갑성 · 최성목 · 이필주 · 박동완 · 양전백 등 YMCA 관계인사 9명을 통하여 적극 지원한 것으로 보인다. 이상재는 이갑성과 박희도등이 주도한 학생중심의 독립운동을 확대하여 천도교, 기독교, 불교가 연합하여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막후역할을 충실히 이행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비폭력 · 무저항의 기독교정신으로 3 · 1운동의 사상적 근간으로 삼는데 노력하였다. 3 · 1운동이후에도 민립대학건립운동 · 기독교사회운동 · 홍업구락부의 조직과 활동 · 신간회 활동 등을 토하여 자주적 민족의식을 고양시켰다.
요컨대, 그는 전근대와 근대 한국사회의 전환기를 배경으로 성장하고 스스로를 단련해 나간 인물로서, 도덕적 기반에 충실하고, 사회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면서, 근대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책임과 권리에 충실한 바람직한 ‘시민의 상(像)’을 창출하는 데 자신을 던진 인물이었다고 하겠다.
영어 초록
The fundamental values which underlay Sang Jae Lee's life was set to the systemization of citizens for and by citizens. He systemized citizens and expanded the citizens’ acting basis from the period of early modem society. Through those activities, he eventually intended to elevate the status of citizens and make use of the citizens’ capabilities as the momentum for the development of our modem society.He grew and disciplined himself on the transitional setting of pre-modem and modem Korean society. He had a replete moral foundation and dealt with social changes positively. It can be said that he was a man who devoted himself in creating a desirable ‘image of citizen’ faithful in his or her responsibility and right as a member of modem society.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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