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혁명가 정이형
- 최초 등록일
- 2009.02.24
- 최종 저작일
- 20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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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잊혀진 혁명가 정이형을 읽고 쓴 감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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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쌍공 정이형은 하동 정씨(河東鄭氏)로, 호적명은 원흠(元欽), 이명은 용현(用賢)이다. 그의 호를 쌍공(雙公)이라고 한 이유는 ‘인생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기 때문’이라고 한다. 정이형의 친구들 사이에서는 ‘저울’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는 그가 얼마나 균형 감각이 있고 형평성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정이형은 일본의 한국침략이 점차 노골화 되던 1897년 9월 16일(음력) 평안북도 의주군 월화면 화하리 198번지에서 출생하였다. 부친 정효기는 월화면에서 많은 토지를 수유하고 있던 대지주였다고 한다.
상당한 재력을 소유한 집에서 태어난 정이형은 일찍이 스승이신 김평식 선생과 형님 정원익 선생의 도움으로 민족의식을 갖게 되었다.
김평식은 정이형의 외가집 어른으로 대한독립단, 의군부등 대한제국의 재건을 주장하는 복벽주의단체에서 총무부장, 정무총감 등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한 인물이고, 정원익은 일찍부터 항일의식을 갖고 구한말 서북학회 회원으로 활동하였고, 1910년 이후에는 독립군에게 군자금과 독립군의 군복을 만들어 제공하였다. 정이형은 김평식과 정원익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 항일투사로 점차 성정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성장한 정이형은 일제의 감시와 추적을 피하고 또 조국의 독립을 종교의 힘을 통하여 달성해 볼 요량으로 금강산에 들어갔다 독립운동가 김계순과 서상연을 만나 의기투합하여 1919년 1월 장성으로 이주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된다는 소식을 듣고 장성에서 동지들과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그 후 이곳에서 선룡사립보통학교를 세우도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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