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계덩어리 서울길 비교,분석,연구
- 최초 등록일
- 2008.12.07
- 최종 저작일
- 20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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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모파상의 비계덩어리
홍구범의 서울길을 비교 연구 분석하여 인간소외와 물질만능주의를 비판함
목차
1) 『비계덩어리』와 『서울길』의 시대적 배경 비교
1) - 1 『비계덩어리』의 시대적 배경 - 프로이센(프러시아) ․ 프랑스 전쟁
1) - 2 『서울길』의 시대적 배경 - 일제 해방 후 시대상
2) 『비계덩어리』와 『서울길』의 공간적 배경 비교
3) 『비계덩어리』와 『서울길』의 등장인물 비교
4) 『비계덩어리』와 『서울길』의 주제 비교
본문내용
1) 『비계덩어리』와 『서울길』의 시대적 배경 비교
1) - 1 『비계덩어리』의 시대적 배경 - 프로이센(프러시아) ․ 프랑스 전쟁
프로이센의 지도아래 통일 독일을 이룩하려는 비스마르크 정책과 그것을 저지하려는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의 정책이 충돌해 일어난 전쟁이다.
1870년 7월 프로이센의 왕가인 호엔촐레른가의 왕자 레오폴드가 에스파냐 왕위에 오르게 되자, 나폴레옹 3세는 이를 강경히 반대하였다. 이 문제로 프랑스와 프로이센의 관계가 악화되자, 프랑스 대사 베네데티는 독일 중부 헤센에 있는 온천장인 엠스에 방문하여 프로이센의 황제인 빌헬름 1세와 회담하였다. 이 때 회담 내용은 베를린에 있던 프로이센의 총리인 비스마르크에게 전보로 알려졌다.
그런데 독일 통일을 위해서는 프랑스의 간섭을 배제해야 된다고 판단한 비스마르크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기를 원했던 그는 프랑스 대사가 프로이센 국왕을 모욕했다는 인상을 주는 내용으로 전보를 고친 뒤, 이를 신문에 발표했다. 이러한 엠스 전보 사건을 이를 조작한 비스마르크의 의도대로 프로이센 국민을 격앙케 하여 프랑스에 대한 강경론으로 기울어지게 만들었고, 이 때문에 프랑스 측도 프로이센에 대한 개전론이 강해짐으로써 1870년 7월 19일 프랑스가 먼저 선전 포고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군비가 우세한 프로이센은 북독일 연방 제국뿐만 아니라 남독일 제국의 지지까지 얻어 병력을 더욱 증강한 뒤, 참모 총자 볼트케의 작전에 따라 프랑스로 쳐들어갔다.
전쟁의 실제상황은 프로이센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하여 9월 2일 나폴레옹 3세는 프로이센군에게 항복하였다. 하지만 프로이센군은 계속 다시 진격해 파리를 포위하고, 파리에서는 공화제 국방 정부가 조직되어 프랑스 국민은 더욱 완강하게 독일군에 저항하였다. 결국 9월 말에 스트라스부르, 10월 말에는 메츠가 함락되자 파리도 1871년 1월 28일 마침내 성문을 열고 말았다.
참고 자료
비계덩어리 서울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