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 최치원의 삶, 참여냐 은둔이냐
- 최초 등록일
- 2008.09.04
- 최종 저작일
- 20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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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비추어 최치원의 삶을 조명하고
그의 정치적인 야망과 추구했던 것, 선택의 기로에서 선 최치원에 대해서 다루어 보았습니다.
최치원이 정치적 참여를 추구하다가 좌절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은둔을 선택했던 이유에
대한 자료가 필요하신 분들이 필요한 자료겠네요^^
목차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
‘참여냐 은둔인가?’....최치원의 삶 속에서 찾아본 그의 고뇌
■당시의 시대적 상황
■고운 최치원 - ‘당대 최고의 엘리트, 영원한 이방인’
■고운 최치원의 사상관 - 풍류도(風流道)
■‘참여냐 은둔인가’라는 명제에 대한 나의 생각
본문내용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
‘참여냐 은둔인가?’....최치원의 삶 속에서 찾아본 그의 고뇌
■당시의 시대적 상황
최치원이 살았던 시기의 시대적 상황은 신라에서만 국한된 것이 아닌, 당시 최고의 세계 제국의 면모를 당나라의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는 최치원이 삶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지침이 될 것이다.
최치원이 당나라에 유학을 가 있었던 17여년간, 당나라는 격동과 혼란의 시기였다. 다채로운 문화가 모여드는 대제국의 영화는 지속되지 못하고 현종과 양귀비의 사치로 인해 당제국의 기강은 문란해져 있었다. 이를 노린 절도사 안록산의 난으로 시작되어 사사명의 난에 이르기까지의 지속된 반란으로 정치․경제가 약화되면서 왕권은 권위를 상실했다. 게다가 당 말엽에 이르러서는 당쟁과 지방에서는 황소의 난으로 왕조의 절대 절명의 위기를 맞고 있는 상황이었다.
당에서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온 후 보게 된 신라의 상황 또한 당나라 못지않게 혼란기에 직면하고 있을 시기였다. 이미 신라 사회는 수차례 왕위 쟁탈전으로 왕위 계승에 있어 적자 계승의 원칙이 무너짐에 따라 지도층의 권위가 무너져 있었으며 진성여왕의 실정으로 인한 기강의 문란, 지방 호족의 성장과 이중수탈로 인한 농민 반란으로 사회질서는 혼란스러웠다. 이러한 여러 문제에 따른 지배계층의 약화와 더불어 ‘골품제에 의한 인재등용 방법’이 사회 지배계층간의 위화감을 조성한 것도 중요한 문제로 등장하였다.
참고 자료
고운 최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