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건제도
- 최초 등록일
- 2008.06.26
- 최종 저작일
- 20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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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위글은 봉건제도 封建制度- feudalism봉건제도에 관하여 쓴글입니다. 통치형태, 봉건제도의 역사, 종사제도, 레벤, 봉건제도의 몰락, 중국과 한국의 봉건제도, 일본의 봉건제도에 관한글인데 논문이나 레포트 쓰실 때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목차
1. 통치형태
2. 봉건제도의 역사
3. 종사제도
4. 레벤
5. 봉건제도의 몰락
6. 중국과 한국의 봉건제도
7. 일본의 봉건제도
본문내용
1. 봉건제도의 역사
좁은 뜻의 봉건제도는 종사제도(從士制度:주종 관계)라는 인적 요인과 은대지제도(恩貸地制度)라는 물적 요인이 법적으로 불가분한 형태로 결합되어 있다. 7세기 말부터 8세기 전반(前半)에 걸쳐서 장차의 카롤링거왕권은 내전, 새로운 정복, 아랍인의 침입이라는 사태에 직면하여 되도록 많은 신하, 특히 기병대를 필요로 하였는데, 처음에는 그러한 가신(家臣)을 급양하기 위한 토지를 일부의 왕령지(王領地)와 대부분의 교회령·수도원령으로 충당하였다.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교회생활이 위태로워졌으므로 743∼744년에 열린 3차례의 공의회(公議會)에서 이렇게 수용된 토지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해결을 도모하였다. 즉, 수용된 토지는 법적으로 모두 교회에 반환되어 교회의 소유권이 확인되나, 가신들의 토지를 빼앗으면 왕권의 기초가 흔들리므로 국왕은 가신들이 앞으로도 그 땅을 프레카리아(Precaria;恩貸地)로서 보유할 것을 명하고, 가신들은 법적 소유자인 교회에 지대(地代)를 내고 또 십일조(十一租;10분의 1세)도 내게 했다. 하지만, 이 땅은 동시에 국왕의 은대지로 간주되어 국왕이 수봉(授封)하는데, 가신은 국왕에게 지대를 네는 것이 아니라 가신으로서의 의무만 다하는 것이다. 이러한 프레카리아는 얼마 후 교회의 그 밖의 프레카리아와 구별해서 <왕명에 의한 프레카리아>라고 했다. 이 왕명에 의한 프레카리아를 매개로 이제까지 주로 성계령(聖界領)에서 실시되어 온 은대지제로는, 거기에서 벗어나서 종사제도와 결합하게 되었다. 같은 무렵, 국왕은 가신에게 자기의 토지까지도 지대의 부담이 없는 종신은대지로 주게 되었고, 이윽고 많은 귀족들도 이것을 본받게 되었다. 카를대제가 즉위했을 때(768), 가신에게 은대지를 주는 일이 이미 일반화되었고, 또 그의 정책에도 힘입어 이 봉건적 주종관계는 급속히 보급, 종사제도와 은대지제도의 결합이 완성됨으로써 프랑크왕국의 국제(國制)의 한 지주가 되었다.
2. 종사제도
좁은 뜻의 봉건제도, 즉 레엔(Lehen:封土)의 주고받음을 수반하는 주종관계의 기본적 특징은 자유인과 자유인 사이에서 맺어지는 관계이며, 종사(가신)만이 의무를 지는 것이 아니라 주군(主君) 쪽도 법적 구속을 받는다는 뜻에서 쌍무적이라는 점에 있다.
봉건제도의 인적 요인인 종사제도는 몸을 맡긴다는 탁신(託身)의 예(禮)를 갖추고 성실을 선서함으로써 설정된다. 이 중 탁신은 종사제도의 기원이 예속적이었던 것을 이어 받아서 종사는 주군의 보호와 권력하에 몸을 맡기고 평생의 복종과 봉사를 약속하는 것이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