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적 지도자, 견훤
- 최초 등록일
- 2008.06.26
- 최종 저작일
- 20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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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려대학교 인물로 보는 한국사 교양수업
왕건, 궁예, 견훤 중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인물에 대해 쓴 글입니다.
학점을 매기지는 않았지만 교수님께서 잘 쓴 레포트로 뽑아주셨어요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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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나는 견훤을 열정적인 사람이라 부르고 싶다. 누구보다도 후삼국 통일에 대한 열망이 컸으며, 황제가 된 이후에도 직접 전선에서 군대를 진두지휘했던 견훤. 그는 말보다는 행동이 앞서는 사람이었다. 몸소 보여주는 정치가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후삼국을 왕건이 통일하면서 그의 그런 면은 오히려 단점으로 서술되어 왔다. 계획성 없고 감정만을 앞세웠다는 것이다. 하지만 열정이라는 것이 그렇게 결과에 의해서 폄하되어서는 안 된다.
견훤은 흔히 농민의 아들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가 나중에 스스로 장군임을 칭한 것을 보면 지방의 호족 세력이었을 수도 있다는 설도 있다. 견훤의 아버지는 그를 출세시키기 위해 서라벌로 보냈다고 한다. 그 외에 그의 유년기에 대해서는 크게 드러난 바가 없다. 혼란한 신라 말기에 견훤은 무진주를 점령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그리고 8년 후, 완산주를 도읍으로 삼고 황제가 되었다. 견훤은 가는 곳마다 농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후삼국 중 견훤이 세력이 가장 컸고, 그를 견제하기 위해 신라는 왕건과 연합하기에까지 이르렀다.
삼국사기는 견훤에 대해 ‘도적들이 틈을 타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 중 가장 악독한 자가 견훤이었다. 견훤은 도읍과 성읍을 침탈하고 임금과 신하를 살육하기를 마치 새를 죽이고 풀을 베듯 하였으니, 실로 천하의 으뜸가는 악인이며 인물들의 큰 원수였다’고 서술한다. 그러나 그것은 승자에 의해 씌어진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견훤이 왕건 못지않은 지도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견훤이 기분파이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너그럽고 인정 많은 지도자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가 후백제를 세우고 40년을 넘게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이 그 반증이다. 궁예가 즉위 후 20년도 채 되지 않아서 물러나야 했던 것과 사뭇 다른 양상이다. 또한 견훤은 외교에도 뛰어났다. 그는 중국과 정식 외교관계를 맺으며 무역을 시작했고 특히 925년엔 직접 후당으로 건너가 백제왕으로 인정받기도 했다. 거란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며, 일본과도 사신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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