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정부의 수립과 발전
- 최초 등록일
- 2008.04.18
- 최종 저작일
- 20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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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광복 이후의 역사에 대하여 정리한 레폿입니다.
목차
광복
남북분단
6 25 전쟁
본문내용
광복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연합국이 제 2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하자 한국도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는 연합국의 승리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동안 우리가 지속적으로 일제의 지배에 항거하여 자주 독립을 추구해 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국내에서의 독립운동, 만주, 연해주, 중국 등에서의 항일 무장 투쟁,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외교적인 노력 등으로 우리 민족은 전 세계에 자주독립에 대한 강한 의지를 밝혔다. 이러한 노력으로 말미암아 중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광복과 더불어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가 결성되어 독립 국가 건설을 추진하였다. 이와 동시에 외국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던 애국지사들이 귀국하였고, 많은 애국지사들이 석방되어 정치 활동을 시작하였고, 강제로 끌려가 노동을 착취당하던 동포들이 고국으로 돌아왔다.
남북 분단
광복 이후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 이승만과 김구가 귀국하여 각각 사회단체를 만들었지만 서로 의견이 달랐고, 국민 의식이 성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의견이 합일되지 못하여 정국이 혼란스러웠다.
광복 이후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에 주둔해 있는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한다는 명목으로 북위 38도선을 군사 분계선으로 정하고, 38도선의 남과 북에 각각 자국의 군대를 배치하였다. 그러나 미국 자유진영과 소련 공산진영의 대립이 심해지자 점차 정치적인 분할선으로 변화되어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할되었다.
1945년 12월 미국, 영국, 소련은 한국을 5년간 신탁통치하기로 합의하였다. 광복 후 독립 정부 수립을 고대하던 우리 민족은 전국적인 반탁 운동을 전개하였다.
미국은 한국의 문제를 유엔 회의에 제기하였다. 이에 유엔은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을 설치하고, 이 위원단의 감시 하에 남북한 총선거를 하여 통일 독립 정부를 수립하도록 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소련은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이 38도선 이북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았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