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의 성립
- 최초 등록일
- 2007.01.09
- 최종 저작일
- 20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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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성립에 대한 레포트입니다.
목차
1. 서론
2. 본론
3. 결론
본문내용
비류와 온조가 이주해 온 한강 유역에는 기원 전후부터 상당수의 부여․고구려계인들이 꾸준히 내려와 정착하고 있었다. 또한, 건국설화에서는 비류와 온조가 함께 남하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 이들은 각기 다른 시기에 남쪽으로 이주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설화에서 온조집단은 하북위례성에 정착하여 십제(十濟)를 세웠다가 하남위례성으로 도읍을 옮긴 후 나라 이름을 백제로 바꾼 것으로 되어 있다. 각지에 정착한 이들은 집단별로 서로 통합되어 갔고, 초기에는 미추홀 집단이 보다 우세하여 연맹체의 중심을 이루었으나 차츰 위례 집단이 강해져 중심세력이 되는 과정이 건국설화에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2) 백제의 건국과정
백제의 건국사를 정리할 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기본사료인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초기기록과 『삼국지』 동이전 한전의 내용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점이다. 동이전에는 3세기 중엽 무렵까지 백제가 마한 54국 중의 하나로 되어 있는 반면, 백제본기에는 온조왕대에 지금의 전라북도 고부까지 영역으로 확보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백제본기에는 3세기 중엽경인 고이왕대에 이미 6좌평 ․ 16관등제라고 하는 잘 짜여진 국가 조직을 갖춘 것으로 되어 있지만, 동이전에는 국의 지배자인 국읍 주수가 읍락 거수들을 잘 제어하지 못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처럼 두 사서는 3세기 중엽경의 모습을 매우 다르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어느 자료에 신빙성을 두느냐에 따라 백제의 건국 ․ 성장 과정을 이해하는데 커다란 차이가 있다. 여기서는 동이전의 백제국과 4세기대의 백제국은 연속선상의 계승 관계를 가지며, 백제본기의 초기 기록은 구체적인 연대나 왕실 계보 및 영역의 확대 등에는 일부 조작(造作)이 가해지거나 후대의 사실이 부회(附會)된 것으로 보는 절충론(折衷論)의 입장에서 정리하였다.
백제의 건국 설화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두 가지의 내용이 실려 있다. 온조(溫祚) 중심의 설화에서는 온조는 고구려 건국자인 주몽(朱蒙)과 졸본왕녀(卒本王女)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 뒤 주몽의 원자인 유리(瑠璃)가 아버지를 찾아와 태자가 되자, 형 비류(沸流)와 함께 남하해 비류는 미추홀(彌鄒忽)에, 온조는 위례(慰禮)에 정착하였다. 그러나 비류가 죽자 그를 따르던 무리들을 통합했다고 되어 있다. 한편 비류 중심의 건국 설화에서는 비류와 온조는 해부루(解夫婁)의 서손(庶孫)인 우태(優台)와 소서노(召西奴) 사이에서 태어났다. 우태가 죽은 뒤 주몽이 졸본으로 망명해오자 소서노는 주몽에게 개가(改嫁)해 고구려 건국을 도왔다. 그 뒤 주몽의 원자가 태자로 책봉되자 비류는 온조와 그 무리를 이끌고 미추홀에 정착했다고 한다.
이처럼 두 가지의 설화가 전해지고 있으나 백제를 건국한 주체 세력이 부여족 계통의 고구려 유민인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비류와 온조가 함께 남하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는 시기를 달리해 비류 집단은 미추홀에, 온조 집단은 위례에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온조 집단은 처음에는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에 정착해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