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대몽항쟁과 대장경 조성의 의의
- 최초 등록일
- 2006.08.29
- 최종 저작일
- 2006.08
- 2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000원
소개글
몽고의 침입과 고려의 대몽항쟁에 대해서 기말시험 대체 레포트로 나왔던 내용입니다. 주변정세부터 비롯하여 대몽항쟁의 원인과 대장경 조판에 대해서 잘 정리해 놨습니다.
목차
1. 몽고와의 외교관계 변화
2. 대몽항쟁과 대장경 조판의 의의
본문내용
대몽항쟁과 대장경 조성의 의의
1. 몽고와의 외교관계 변화
고려가 몽고와의 관계를 맺은 것은 고종 6년(1219) 강동성에서 거란족을 함께 물리친 직후였으며, 이를 계기로 양국은 형제동맹을 맺고 몽고의 일방적인 요구에 따라 세공을 납부하게 되었다. 불평등한 외교관계를 통한 몽고의 과도한 공물 요구와 무례한 행동은 고려의 입장에서는 커다란 부담과 불만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에 고종은 방비를 갖추고 사신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까지 하였다. 양국은 결국 고종 12년(1225) 몽고사신 저고여의 피살을 계기로 국교가 단절되었으며, 이를 명분으로 고종 18년(1231)부터 고종 46(1259)까지 30년간 지속적인 몽고군의 침략이 자행되었다.
몽고의 침략은 고려인들에게 많은 피해와 고통을 가져다주는 것이었다. 고종 23년 있었던 3차 침입 당시 ‘지금 백성들은 열에 두세 명만 남아 있고 만약 몽고가 물러가지 않는다면 농사를 짓지 못하여 모두 적에게 투항하게 될 것이다’, 고종 34년(4차) ‘산천에 대피한 백성들 중 모두 곤경을 당하여 화를 면한 자가 드물었다.’, 고종 41년(6차) ‘몽병에 포로가 된 남녀가 무려 이십만 육천 팔백여인이었고, 살육된 자는 셀 수가 없으며 지나가는 주군은 다 잿더미로 되었다’등의 기록은 당시 고려인의 사정을 잘 알려주는 것이다.
2. 대몽항쟁과 대장경 조판의 의의
이러한 상황에서 이들은 침략군에 맞서 적극적으로 대몽항쟁의 대열에 나서게 되었으며, 도처에서 빛나는 전과를 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반해 최우 등 무인 정권은 고종 19년 7월 고려정부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을 산성과 해도로 입보토록 하는 효과적인 반몽항전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바다 모퉁이 섬인 강화도로 천도를 단행하였으며, 이후 사신의 파견을 통한 외교적 교섭에 치중하는 소극적인 항전자세를 견지하고 있었다. 이는 중앙정부의 일방적인 입보명령만 되풀이 될 뿐 이에 대한 적극적인 대책을 마련해주지는 못하였다. 따라서 백성들에게는 많은 경제적 고통이 수반되었다.
몽고의 계속되는 침략에 대응하여 민중들은 자신의 생명과 가족, 삶의 터전을 지키지 위해 자체방어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들은 내륙의 주요거점인 산성에 의지하여 몽고 기병의 예봉을 피하면서 수성전을 전개하거나, 소규모 병력으로 그들을 습격하여 적의 후방에서 군수 물자 등을 탈취하는 유격전을 전개하여 침략군에게 많은 타격을 주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수성전과 유격전의 전개는 고려의 반몽항전의 기본적인 전략전술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몽고침략이라는 현실 속에서 신분계층의 분화보다는 지역적인 소규모의 집단이 형성되기 마련이었고, 실제로 당시의 일반민중으로부터 과거에 급제한 지식인이나 국학생, 품관은 물론 노비에 이르기까지 신분계층의 고하를 막론하고 반몽전을 공동으로 수행하였다.
참고 자료
편집부. 고려사. 아세아문화사. 1983
정인지외. 신편 고려사. 신서원. 2001
정인지외. 고려사열전. 계명대학교출판부. 2001
김종서외. 고려사절요. 신서원.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