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문학]신재효는 어떤인물인가?
- 최초 등록일
- 2006.04.11
- 최종 저작일
- 20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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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신재효는 어떤 인물인가에 대해서 알 수 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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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812(순조 12)∼1884(고종 21). 조선 후기의 판소리 이론가·개작자·후원자.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백원(百源), 호는 동리(桐里). 전라남도 고창 출생. 아버지 광흡(光洽)은 경기도 고양 사람으로 한성부에서 직장(直長)을 지내다가 고창현의 경주인(京主人)을 하던 선대의 인연으로 고창에 내려와 관약방(官藥房)을 하여 재산을 모았다. 어머니는 경주 김씨로 절충장군 상려(常礪)의 딸이다. 신재효는 어려서 총명하였고, 또한 효성이 지극하여 그런 이름을 지었다 한다. 어려서 아버지에게 수학하였고, 사십이 넘어서 부근에 살던 대석학과 학문을 의논하였다고 하는데, 그가 누구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는 고창현의 향리와 서민들과 깊이 사귀었을 뿐만 아니라, 죽은 뒤에 여러 향반(鄕班)들이 만장을 써 보낸 것으로 보아, 신분을 넘어선 폭넓은 교유를 맺었으리라 추정된다. 그는 아버지가 마련한 기반을 바탕으로 35세 이후에 이방이 되었다가 나중에 호장(戶長)에 올랐다. 1876년(고종 13)에 기전삼남(畿甸三南)의 한재민(旱災民)을 구제한 공으로 정3품 통정대부가 되고, 이어 절충장군을 거쳐 가선대부에 승품(陞品)되고, 호조참판으로 동지중추부사를 겸하였다. 신분 상승을 꾀하면서도 한시가 아닌 판소리에서 정신 세계를 찾은 그는 판소리를 즐기는 동시에 자신의 넉넉한 재력을 이용하여 판소리 광대를 모아 생활을 돌보아 주면서 판소리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직선적이고 기교는 없으나 예스럽고 소박한 성음을 갖추면서 박자가 빨라 너름새를 할 여유가 없는 동편제(東便制)와 유연하고 화려한 성음을 갖추면서 박자가 느려 너름새가 쉽게 이루어지는 서편제(西便制)의 장점을 조화시키면서, 판소리의 듣는 측면에 덧붙여 보는 측면을 강조하였다. 신재효는 19세기 후반(후기8명창시대) 지방향리 출신으로 광대가 아니면서도, 판소리의 심취한 후원가로서, 판소리 사설의 집성자로서, 이론가 비평가로서, 그리고 판소리의 지도자로서 창단의 바깥에서 당대에 가장 심대하게 판소리 광대들과 그 향유자(어전을 포함하여)들에게 영향을 미친 문제적 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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