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근현대사]민중을 끌어들인 공산당
- 최초 등록일
- 2005.07.18
- 최종 저작일
- 20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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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서론: 5.4운동과 공산당의 탄생
본론: 국공합작
국민정부의 공산당 결별
결론: 국민정부의 패배와 공산당의 승리의 이유
본문내용
이 군사행동은 초기 단계부터 성공을 거두었다. 26년 10월 무렵에는 이미 양자강 유역까지 도달하여, 이곳을 지배하던 직예파 군벌 오패부를 패배시켰고, 수도를 무한으로 옮기게 되었다. 1927년에는 다시 북 상하여 남경과 상해 등지를 점령한 뒤, 최종적으로 북경을 점령하여 북벌을 완수한 것은 1928년이었다. 물론 북벌 과정에서 과거의 군벌들 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1930년에도 구군벌인 염석산, 풍옥상, 이종인 등이 연합하여 장개석의 국민당 군대와 전쟁을 치루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북벌의 완성이란, 부분적으로 군벌들이 장개석의 군 사력에 복종하는 댓가로 자신의 현위치를 고수한 결과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외형상으로 볼 때 군벌지배는 종식되었다. 이에 따라 남경을 중화민국의 수도로 정하고, 국민정부 조직법을 공표하고 삼민주의에 입각하여 서양과 같은 삼권 분립의 원칙에 따라 입법원, 사법원, 행정 원의 3원과 중국적 특색이라고 할 수 있는 고시원, 감찰원 등 2원을 합쳐 5원으로 정부를 구성하였다. 대총통으로는 장개석이 선출되었다. 중국을 대표하는 유일한 정부가 새로이 탄생한 것이다. 한 역사가가 남경의 국민 정부를 가리켜 당시로서는 가장 현대적인 정부라고 지칭 한 바 있지만, 국민 정부는 일단 공화정부의 틀을 갖추게 되었던 것이 다.
그러나 국민당 정부는 이미 북벌과정에서 공산당과 결별을 선언함으로써, 새로운 적을 만들었다. 국공합작 자체가 국민당 좌파에 의해 주도된 것이었고, 이들과 공산당이 장악하고 있던 무한정부도 호남과 호북 지역을 중심으로 토지개혁을 실시하고 세력을 계속 확장하였기 때문에, 공산당에 적대적인 국민당 우파는 장개석 및 국민당 군대와 연 합하여 좌파 및 공산당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1927년 4월 12 일, 상해에서는 장개석 군대가 쿠테타를 일으켜 공산당 조직을 일거에 파괴하였고, 이리하여 양자간의 협력관계는 사실상 끝장나 버렸다. 중국 공산당은 지하로 숨을 수밖에 없었으며, 당연히 국민당은 극우적인 반공주의 편에 서게 되었다. 대체로 도시의 부르주아나 농촌의 지주계급를 사회기반으로 하고 있던 국민 정부의 이 정책은 미래의 농민혁명을 거의 예측하지 못한 결과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