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죽지랑가
- 최초 등록일
- 2005.01.10
- 최종 저작일
- 20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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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배경설화
2.'모죽지랑가' 배경설화의 이해
3.단평
본문내용
익선은 노비관리관 또는 역역조달관 등과 같은 문관 계통의 관리였다. 설사 그의 직위가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치더라도 이미 사양길에 들어선 무관들의 처지보다는 우월한 입장을 지킬 수 있는 자리였다고 본다. 결국 익선이 득오를 임의로 끌어가고 또 득오를 구출하러 간 죽지를 묵살하게 된 사회적 동기는 문관 위주의 시대적인 환경이 익선으로 하여금 아무 거리낌없이 방자스런 행동을 자행토록 하였다고 판단된다. 둘째 전왕대인 신문왕 원년에 일어났던 왕실에 대한 김돌의 모역사건이 상당한 영향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즉 김돌이 모반함에 따라서 그 여파가 죽지랑 등에까지 파급되어서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거의 무력한 상태에 놓여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익선마저 넘보는 대상이 되었을 공산이 크다는 점이다. 셋째 죽지랑이 내물계의 인물이었다는 점도 일단 문제가 된다. 그를 비롯한 김유신계나 김돌 등은 무열왕계의 치하에서는 도저히 권세의 자리에 머물 수 없는 성분들이었다. 전제체제를 굳히려는 왕실의 입장에서 볼 때는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계층에 해당하는 인물일 수밖에 없었다. 죽지랑에 가한 익선의 오만불손한 행위에 대해 후에 중앙정부가 모량리인 전체에까지 파급시켜 응징을 가한 사실을 두고 화랑에 대한 국가적인 우대라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으나, 평소 모량부에 대한 중앙정부의 차별 대우 등을 참작할 때 삼국유사 원문에서 볼 수 있는 조정의 사후처리는 죽지랑 사건을 빙자하여 모량부 세력을 상대로 감정적이고도 고의적인 것으로 판단될 뿐 죽지랑 개인에 대한 존숭의 의미로 그러한 처리를 단행한 것만은 아니라고 헤아려진다.
참고 자료
박노순, 「신라가요의 연구」, 열화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