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학과] 항우와 유방
- 최초 등록일
- 2004.12.04
- 최종 저작일
- 20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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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항우의 실패 원인
항우는 유방에 비해 전력면에서 절대 우위에 있었지만 결국 실패자로서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하고 조용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가 실패한 원인을 되짚어보지 않을 수 없으며, 그것은 바로 그의 성격과 통치 스타일에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결론지을 수 있다.
첫째, 항우는 용맹하였지만 지략이 없었다. 그가 스스로 "힘은 산을 뽑을 수 있고 기개는 온세상을 덮을 만하다"고 과시한 것은 차치하고, "키가 8척이고 힘이 세발 달린 큰 솥을 들어올릴 수 있었다"고 한 『사기』의 기록만 가지고 말하더라도 그의 힘과 용맹을 충분히 읽을 수 있다. 항우는 바로 이러한 힘과 용맹을 바탕으로 숙부 항량을 따라 반진(反秦) 투쟁에서 뛰어난 공적을 세웠던 것이다. 이러한 항우의 용맹함을 볼 수 있는 예를 두 가지만 들어보겠다.
초한군이 광무(廣武)에서 대치하였을 때, 항우는 3명의 장사를 보내어 유방에게 싸움을 걸게 하였으나, 그들이 모두 유방의 사수(射手) 누번(樓煩)의 화살에 맞아 죽어 버렸다. 화가 난 항우가 직접 갑옷을 입고 창을 집어들고는 싸움을 걸었다. 누번이 다시 그에게 활을 쏘려하자 항우가 눈을 부릅뜨고 꾸짖으니 누번은 감히 그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화살도 쏘지 못하고는 황급히 진지로 도망쳐들어가 나오지 못하였다.
또 항우가 오강에서 자결하기 전 도망치는 도중에 한나라 장수 양희(楊喜)가 끝까지 추격해오자 항우가 말고삐를 돌려 눈을 부릅뜨고 꾸짖으니 양희의 병사들과 말이 깜짝 놀라 몇리 밖으로 달아나 버렸다.
항우는 바로 이렇게 삼군을 휩쓸어 버릴 수 있는 용맹한 힘으로 진나라 말기의 농민전쟁에서 연전연승을 거두면서 마침내 서초패왕에 올라 권력의 정상에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항우는 비록 용맹하였지만 그것은 단지 필부(匹夫)의 용맹함에 불과하였으며, 그에게는 지략이 부족하고 앞을 내다보는 전략이 없었다. 항우가 관중에 들어간 후에 어떤 사람이 그에게 관중의 왕에 오를 것
참고 자료
▶ 김구진, 『이야기 중국사1』, 청아출판사,1985
▶ 강용규, 『인물로 보는 중국사』, 학민사,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