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치호와 김교신] 윤치호와 김교신
- 최초 등록일
- 2003.08.19
- 최종 저작일
- 20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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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숱한 전쟁의 포화 속에서 살아온 우리 한민족.. 그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수많은 위대한 인물들을 접할 수 있다. 특별히 이번 계기를 통해서 기독교가 뿌리내리고 지금까지 그 이름들이 우리의 뇌리 속에서 깊게 남게해 준 윤치호와 김교신에 대해 알아보고 더불어 비교해 보고자 한다.
윤치호는 인터넷 상에서도 친일파니 민족의 선각자니 하는 논란이 지금도 끊임없이 일고 있음을 이번 조사를 통해 새삼 우리에게 보여준다. 윤치호의 일대기를 간단하게 살펴보겠다. 본관 해평(海平), 호 좌옹(佐翁). 충남 아산(牙山)출생이다. 구한말의 정치가, 민족 운동가로서 당시 개화파 지식인이다. 일찍이 중국, 일본에서 수학을 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미국대학을 졸업한 당시에는 드문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일찍부터 개화운동에 투신한 그는 1881년 신사유람단을 따라 일본에 다녀온 뒤 미국에 건너가 신학문을 배웠다. 1883년 한미수호조약 비준 때 초대 주한 미국공사 L.H.푸트의 통역관으로 귀국하여, 1884년 갑신정변에 가담, 실패하자 상하이로 망명, 중서 서원에서 3년 동안 공부하며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그리스도교가 되었다. 선교사 A.J.앨런의 주선으로 미국으로 가서 밴더빌트대학과 에모리대학에서 영어·신학·인문사회과학 등을 공부하였다. 1895년 귀국, 총리대신 비서관을 거쳐 학부협판이 되었으나, 춘생문 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하였다. 그 후 서재필, 이상재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하였으며, 1898년 독립신문사 제2대 사장, 함경도 덕원부윤, 천안군수 등을 지냈다. 1906년 장지연 등과 대한자강회를 조직, 회장이 되어 교육사업에 힘썼다. 1910년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YMCA)을 조직한 후 대성학교 교장으로 있다가 11년 105인 사건으로 10년형을 선고받았다. 일제강점기 말에 한때 변절, 일본제국의회의 칙선 귀족원의원을 지냈으나, 8·15광복 후 친일파로 규탄 받자 자결을 하고 만다. 그는 우리나라 감리교의 창설자이기도 한다. (대한 감리교 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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