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민주화 운동 분석 및 답사보고서
- 최초 등록일
- 2017.12.23
- 최종 저작일
- 20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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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5월 18일. 다른 지역은 몰라도 적어도 광주에서는 소란스러운 날이자 엄숙한 날이 된다. 올해도 역시나 5.18 민주화운동묘역에는 각계 정치인들이 모여 추모하는 모습이 TV에 실렸다. 그 과정에서의 다툼들. 국정원장의 민주 성역에서의 퇴장을 요구하고,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논란이 인다.
5월의 그날만 되면 시끄러워 지는 광주. 도대체 그날에는 어떠한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때마침 5.18을 맞아 답사지를 5.18기념관으로 정하였으며 그날엔 정확히 어떠한 일들이 일어났는지 조사해 보기로 하였다. 5.18을 알기엔 우선 역사적 배경을 알아야 한다. 민주주의를 향한 투쟁이 일어나기 전 대한민국은 어떠한 상황이었는지부터 짚어보았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의 독재정권은 경제성장을 위해 무리한 투자를 하다 경제악화를 불렀고, 유신헌법과 긴급조치로 민주화 운동 세력을 탄압하였다.
10월 26일 만찬 도중,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대통령 박정희와 경호실장 차지철을 살해했다. 이 사건으로 박정희의 독재정권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1979년 12월 12일
10. 26 사건의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은 전두환이 대통령인 최규하의 승인 없이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인 정승화를 강제 연행한 사건.
전두환과 정승화 사이엔 10. 26 사건 수사와 군인사문제로 갈등이 있었다. 신군부세력은 주도권 장악을 위해 정승화가 김재규로부터 돈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사건 수사에 소극적이고 비협조적임을 내세워 보안사 서빙고로 강제 연행했다. 이는 대통령의 승인 없이 진행되었으며, 사후 승인을 받기 위해 압력을 가했다. 13일 새벽, 결국 신군부세력은 대통령으로부터 사후승인을 받아냈다.
이 사건으로 전두환과 노태우 등의 신군부세력이 군의 주도권을 장악하여 제5공화국의 중심세력으로 등장하였다.
1980년 5월 13일
서울의 봄. 서울 32개 대학에서 약 10만 여명의 학생과 군중들이 안개정국 해결을 요구하며 시위하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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