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들어가면서
Ⅱ. 홍콩의 할양(割讓)
1. 아편전쟁의 발발과 남경조약(南京條約)
2. 할양 전, 홍콩이 가지는 의미
3. 홍콩의 성장
Ⅲ. 홍콩의 반환(返還)
1. 1997年 7月 1日
2. 반환 후, 홍콩이 가지는 의미
Ⅳ. 나오면서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들어가면서
형편이 어려운 집안에 아들이 둘 있었다. 그들의 부모는 입에 풀칠하기도 힘겨워 어쩔 수 없이 입양을 결정한다. 첫째는 장남이라 보낼 수 없어 둘째를 입양 보냈는데, 둘째가 성공을 해서 돌아온다는 이야기가 있다. 바로 현재 쇼핑의 중심지, 금융허브라 불리는 ‘홍콩(香港)’의 이야기다. 홍콩은 영국에 입양 보내진 아들인 셈이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말했다. ‘중국을 먹는 자가 19세기를 지배한다.’ 이 말은 중국이 서양 열강의 먹잇감으로 안성맞춤이었다는 뜻이다. 커다란 영토와 그 영토를 가득 메운 인구는 서양인에게 있어 매력적인 시장으로 보였던 것이다. 영국은 가장 먼저 그 매력적인 열매를 맛보려했다. 결국 영국은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다. 그 중 하나가 지리상으로 무역의 최적지인 홍콩의 할양이었다. 홍콩의 할양이란 그 당시 중국에게는 굴욕이었지만, 지금에 와서 그 조치는 고맙게 여겨질 때도 있었다. 그렇다면 중국에게 있어 홍콩의 할양과 반환이 사회적, 경제적으로 가지는 의미가 무엇일까?
앞으로 전개될 본문에서는 아편전쟁을 중심으로 한 홍콩의 의미 변화와 홍콩의 발전, 홍콩의 반환 이후의 모습도 살펴볼 것이다.
Ⅱ. 홍콩의 할양(割讓)
1. 아편전쟁의 발발과 남경조약(南京條約)
중국시장은 ‘해금(海禁)’이란 단어로 서양인의 무분별한 출입과 교류를 제한하고 있었다. 문물교류는 오직 청조가 허가한 광주에서만 가능했다. 또한 청조에서 인정받은 광동 13행이라는 특허상인들만이 외국과의 무역을 독점하고 있었다.
중국은 교류를 통해 부를 쌓기 시작했는데 가장 고객이었던 국가가 바로 영국이었다. 영국 내에서 중국의 수출품인 차(茶)에 대한 수요가 점차 늘어났기 때문이다. 반면, 영국이 좋은 품질을 자랑하던 면포는 중국인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영국은 막대한 양의 은을 중국에 쏟아 부어야 했다. 게다가 미국의 독립전쟁으로 영국의 효자상품인 면포생산이 활발해지지 못하자 영국은 위기의식을 느끼기 시작했다. 영국은 중국으로 유입되는 은을 되돌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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