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전쟁 레포트
- 최초 등록일
- 2016.06.09
- 최종 저작일
- 20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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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배경
Ⅱ. 전개
Ⅲ. 의의
Ⅳ. 맺음말
본문내용
Ⅰ. 배경
이슬람 세력은 6세기부터 8세기 초까지 놀라운 속도로 그 세력을 확장시켰다. 7세기 중엽까지 시리아와 사산조 페르시아, 그리고 이집트를 정복하고, 동으로는 중앙아시아와 인더스 강 유역까지 진출하였고, 서로는 카르타고를 점령하였다. 그리고 711년에는 에스파냐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10세기부터 11세기 무렵까지 에스파냐에서의 그리스도교 국가들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면서도 꾸준히 이슬람세계를 압박하였다. 그리하여 11세기 말 경에는 이베리아 반도의 일부 지역에서만 이슬람 세력이 잔류하였다.
그렇다면 유럽 대륙의 상황은 어떠했을까? 1071년의 만지케르트 전투, 1077년의 ‘카노사의 굴욕’. 이 두 가지 사건은 십자군이 일어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동로마 제국은 11세기 초까지는 바실리우스 2세의 지휘 하에 동유럽과 중동에서 막강한 세력을 떨쳤으나 바실리우스 2세가 죽은 후 연달아 무능한 13명의 황제가 난립하며 혼란과 쇠퇴를 가져왔다. 이 무렵에 동로마 제국의 국고는 탕진되고, 지방귀족의 세력이 확장하여 군대의 핵심인 자유농민이 예농화되었으며, 중앙정부의 세력은 상대적으로 약해졌다. 동쪽에서 셀주크 투르크가 침략하면서 제국은 위기에 처했다. 만지케르트 전투에서는 셀주크군 비잔틴 군을 격파하고 로마누스를 포로로 잡았다. 이로써 니케아, 안티오크 등 아나톨리아의 대부분이 셀주크의 손에 들어갔고, 셀주크 투르크는 이집트를 제외한 중동을 장악하게 된다.
이후에 6년 뒤, 유럽에서 ‘카노사의 굴욕’이 일어났다. 로마 교황과 독일 황제의 대립을 상징하는 이 사건은 결국 하인리히 4세가 카노사에서 교황에게 머리를 숙인 사건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교황권이 최종 승리를 거둔 것은 아니었다. 하인리히 4세는 절치부심하며 클레멘스 3세를 대립교황으로 내세운 뒤 1082년에는 로마를 공격하여 그레고리를 내쫓아 버린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