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위
- 최초 등록일
- 2015.02.10
- 최종 저작일
- 2014.04
- 4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000원
목차
1. 생애
2. 교유관계
3. 문학사상
1) 詩中有人 詩外有事
2) 本質과 正統性에 대한 인식
3) 중국 문예사상의 수용
본문내용
1. 생애
신위(申緯, 1769년~1845년)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한수(漢叟), 호는 자하(紫霞)
·경수당(警修堂)이다. 아버지는 대사헌 대승(大升)이며, 어머니는 이영록(李永祿)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신동이라 불리었고 14세 때 정조가 그를 크게 칭찬하였다. 1799년 알성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초계문신(抄啓文臣)에 발탁되었다. 1812년(순조 12) 진주겸주청사(陳奏兼奏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갔는데, 이때 그는 중국의 학문과 문학에 대하여 실지로 확인하면서 자신의 안목을 넓히는 기회로 삼아 중국의 학자·문인과의 교유를 돈독히 하였다. 특히, 당대 대학자 옹방강(翁方綱)과의 교유는 그의 문학세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1814년에 병조참지를 거쳐, 이듬해 곡산부사로 나갔다. 이때 피폐한 농촌의 현실을 확인하고 농민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하여 조정에 세금을 탕감해달라는 탄원을 하기도 하였다. 1816년 승지를 거쳐, 1818년에 춘천부사로 나갔다. 이 때 그는 그 지방의 토호들의 횡포를 막기 위하여 맞서다 파직까지 당하였다. 1822년 병조참판에 올랐으나 당쟁의 여파로 다시 파직된 뒤, 곧 복관되어 1828년에는 강화유수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윤상도(尹尙度)의 탄핵으로 2년 만에 또다시 물러나 시흥 자하산에서 은거하였다. 1832년 다시 도승지에 제수되었으나 벼슬생활에 환멸을 느낀 끝에 사양하여 나가지 않았다. 다음해에 대사간에 제수되어 이에 나아갔으나 경기암행어사 이시원(李是遠)이 강화유수 때의 실정을 거론, 상소함으로써 평산에 유배되었다. 그 뒤 다시 복직되어 이조참판·병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당시 詩·書·畵의 三絶로 일컬어졌으며, 조선 이래 시작이 가장 많았고 백년 이후의 시인들도 모두 그를 작시법의 스승으로 추대하였다. 천재적 시인으로 그의 이름은 국내보다 중국에 널리 알려졌고, 청조의 시풍을 민감하게 받아들여 참신한 시를 썼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