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 황남대총
- 최초 등록일
- 2003.06.15
- 최종 저작일
- 20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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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서론- 신라 문화에 따른 황남 대총의위치
본론-1. 무덤의 구조
2. 묻힌사람
3. 유물
4. 말의 문화
5. 신라 문화의 기원
결론- 신라의 문화의 기원설명및 마무리
본문내용
우리는 황남대총의 구조나 거기에서 출토된 유물로 봐서 신라의 문화의 기원이 동시대에 존재했던 고구려, 백제의 문화와는 달리 동서 7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광대한 초원에서 즉 알타이계통의 문화에서 유래되었음을 얼핏 알 수가 있었다. 하지만 기원전의 알타이 적석목곽분과 4세기 경주의 적석목곽분, 그 사이의 시간을 이어 줄 고분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50여개의 능들이 굽이치는 능선을 그리고 있는 대릉원일대, 그들 김씨왕조들의 전용 묘역으로 알려진 이 곳에서 이 시간의 수수께끼를 풀어 줄 무덤을 모두 찾아볼 수는 없는 것이다. 김씨 최초의 왕인 미추왕으로부터 지증왕까지 7대왕과 그 왕족들만이 묻혀 있을 뿐이다. 이후의 왕들은 왜 대릉원을 떠났을까? 어디로 갔을까?
법흥왕 이후부터 신라의 무덤은 평지를 버리고 산으로 올라가게 된다. 즉 신라의 재래적인 묘제였던 적석목곽분이 6세기 전반부터 외래문화인 횡현식 석식분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평지에서 산으로 무덤이 올라가는 동안, 통나무로된 지붕 위의 방이 돌방으로 바뀌는 동안, 초원 기마족의 전통과 세계관은 잊혀져 갔다. 먼 대륙으로부터 한반도의 남단까지 달려와서 마침내 신라인들은 말에서 내린 것이었다. 그때부터 이 땅에선 금관도 사라졌다. 가장 강성한 국력을 자랑했던 통일신라 때에도 금관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성스러운 나무와 황금의 사슴뿔, 그것은 대 능원의 주인들이 초원의 기억을 한때에나마 간직하고 있을 때 나타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문화의 발굴이 아직 끝난 것은 아니다. 황남대총의 일대에는 아직 발굴되지 않은 적석목곽분들이 무수히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이 무덤들의 발굴이 이루어 질 때, 유라시아 초원과 신라를 잇는 한 종족의 행로는 더욱 분명해질 것이며, 그 때 비로소 신비의 베일에 둘러 쌓여 있는 신라의 문화는 베일을 벗고 그 찬란했던 황금문화와 기마인족의 문화인 초원의 문화를 야성의 피의 문화를 우리에게 전해줄 것이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