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출산에 따른 왕비의 신분적 지위(사례중심)
- 최초 등록일
- 2014.05.08
- 최종 저작일
- 20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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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덕종의 비 소혜왕후
2. 선조의 비 인목왕후
3. 고종의 비 명성황후
본문내용
1. 덕종의 비 소혜왕후
소혜왕후(昭惠王后, 1437~1504)는 군부인에서 왕세자빈으로, 그리고 다시 대군부인이 되었다가 왕대비, 대왕대비로서의 삶을 산 왕실 여성이다. 그러나 남편인 의경(義警)세자가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일찍 죽게 됨으로써 왕비로서의 삶은 살지 못하였다. 대신 자신의 둘째아들인 성종(成宗)이 왕위에 오르면서 왕대비의 지위에 올랐다. 소혜왕후는 왕실여성의 지위와 생애가 왕위계승문제와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잘 보여주며 15세기 왕실 여성의 생활체계를 잘 드러내 주는 인물이다.
소혜왕후는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한확(韓確)과 남양 홍씨와의 사이에서 1437년(세종10) 여섯 번째 막내딸로 태어났다. 시대적으로 조선이 건국된 이후 세종이 왕위에 있었던 때로 어느 정도 정치적 안정이 이루어지고 문화가 발달하였으며 성리학적 유교사상이 발정되어 가던 사회문화적 분위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소혜왕후는 두 고모가 명나라 황제의 후궁이 되었고 아버지가 명나라에서 벼슬을 지내기도 한 특별한 가정환경에서 자라났다.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인 남양 홍씨가 13살 무렵 일찍 죽음으로써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소혜왕후는 세조(世祖)가 아직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신분으로 잠저(潛邸)에 있었을 때인 1455년(단종3)에 19세의 나이로 수양대군의 맏아들 도원군(桃源君) 장(暲)과 혼인하여 군부인(郡夫人)이 되었다. 같은 해 시아버지 수양대군이 단종(端宗)을 폐위하고 왕위에 오르면서 남편이 세자로 책봉되었고 그녀는 왕세자빈이 되어 수빈(粹嬪)에 책봉되었다.
1456년(세조2) 4월에 명나라에 고명(告命), 관복(官服), 채단(綵緞)의 흠사(欠事)를 사례하고 세자 책봉을 주청하는 표문(表文)을 올리게 되었을 때 친정아버지인 한확이 표문을 받들고 이 일을 수행하기 위하여 명나라에 가서 세자 책봉을 주청하였다. 그러나 9월에 세자의 고명을 받들고 조선으로 돌아오던 중 갑자기 병을 얻어 죽게 된다. 그 때 소혜왕후의 나이는 20세였다.
참고 자료
소혜왕후의 『내훈』 저술과 여성교육 / 김희연
조선 왕실의 출산문화 연구 : 역사인류학적 접근 / 김지영 · 삼국간섭과 명성왕후의 대외정책 / 엄윤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