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건국과 발전
- 최초 등록일
- 2013.12.26
- 최종 저작일
- 20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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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백제의 건국과 발전에 대해 조사했습니다.
목차
1. 백제의 건국
2. 백제의 발전
본문내용
주몽이 첫째부인 예씨의 아들 유리를 태자로 책봉하여, 소서노의 아들 비류와 온조는 남하하여 비류는 미추홀, 온조는 하남의 위례성에 터전을 잡았다. 그러나 비류가 터를 잡은 미추홀은 한강변이라 땅이 습하고 물이 짜고 농사짓기에 부적합했다. 그래서 날이 갈수록 백성이 줄어들고, 곧 그 나라는 망했다. 반면 온조가 터를 잡은 하남은 땅이 비옥하고 물이 짜지도 않았으며 교통이 편리하였다. 결국 부끄러운 비류는 자결을 택한다. 온조의 십제(열 명의 신하를 거느림)는 비류가 데리고 갔던 백성들까지 모두 받아들여 백제로 나라 이름을 바꾼다.
또한 성씨는 부여에서 갈라져 나왔다 하여 부여로 삼았다.
백제의 발전
온조왕이 46년간 통치 후 죽고, 아들 다루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다루왕은 북쪽에서 말갈족이 자주 침입하자 두 차례에 걸쳐 크게 무찔렀고 왕의 말년에는 신라를 공격하여 낭자곡성까지 국토를 넓혔다.
8대왕 고이왕
6대 구수왕에 이어 맏아들 사반왕이 왕위에 올랐으나 나이가 어려 정치를 제대로 못하자 이를 폐위시키고 고이왕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 고이왕 27년 1월에 관제를 제정하여 6좌평과 16직제를 마련하였고, 2월에는 복장제를 마련하여 6품 이상의 관원은 자색관복에 은화관을 쓰고, 11품 이상은 비색, 16품 이상은 청색 관복을 입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부락정치나 다름없던 정치 체제를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로 발전시키는 동시에 율령 반포까지 시행한다. 관리들의 뇌물 수수를 금지하는 범장지법을 제정하고 국가의 경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국토의 남쪽 평야지대에 논을 개간하도록 하여 농업 생산력의 증대를 장려하였다. 또한 낙랑군, 대방군과의 관계에서는 이전 소극적이고 방어적이었던 자세에서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자세로 전환시켰으며, 남당을 설치하여 국정의사결정기관으로 삼았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