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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 등록일
- 2013.07.20
- 최종 저작일
- 20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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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5 18광주민중항쟁(5 18광주민주항쟁, 5 18광주민주화운동)의 중요성
Ⅲ. 5 18광주민중항쟁(5 18광주민주항쟁, 5 18광주민주화운동)의 정체성
Ⅳ. 5 18광주민중항쟁(5 18광주민주항쟁, 5 18광주민주화운동)의 정치성
Ⅴ. 5 18광주민중항쟁(5 18광주민주항쟁, 5 18광주민주화운동)의 일체성
Ⅵ. 5 18광주민중항쟁(5 18광주민주항쟁, 5 18광주민주화운동)의 자치성
Ⅶ. 5 18광주민중항쟁(5 18광주민주항쟁, 5 18광주민주화운동)의 저항성
Ⅷ. 5 18광주민중항쟁(5 18광주민주항쟁, 5 18광주민주화운동)의 예술성
Ⅸ.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서론
1980년 4월까지 학생운동은 주로 유신체제의 잔재인 학원 내부의 비민주적 요소의 청산, 곧 학원 민주화투쟁에 주력하였다. 10-26으로 인해 야기된 상황은 부·마항쟁을 간접적 원인으로 하여 발생하였지만, 그것은 권력 내부의 암투가 직접적 원인으로 발생한 것으로서 민중에 의한 혁명의 성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곧 박정희의 일인독재는 붕괴되었지만 지배체제와 지배계급 자체가 붕괴된 것은 아니었다. 지배계급의 입장에서 볼 때 이것은 권력의 정점의 상실이고, 그들의 지위를 보장해 주는 보루의 붕괴였다. 따라서 그들은 유신체제를 반대하며 성장한 재야세력의 급속한 부상을 막고 그들의 이해를 지속적으로 관철시킬 수 있는 독재체제를 재구축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재야세력은 오랜 반독재투쟁에 투신하여 왔다. 그러나 이들은 독재권력에 반대하는 투쟁가로서는 그 명망이 있을지 몰라도, 정권을 장악하여 민주정부를 운영하여 나갈 역량을 갖추지는 못했다. 더욱 이들은 갑자기 도래한 상황의 급속한 변화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결여하였고, 오히려 10·26 발생으로 야기된 권력의 공백상태에서 차기 집권을 노리는 일부 세력의 분열로서 그 시기를 장식 하였다. 그 결과 12·12쿠데타를 거치면서 지배세력은 권력 개편을 급속히 이루며 보수반동의 체제를 확립해 나가는 반면, 재야세력은 분열된 나머지 이에 적절한 대응전략을 수립하지 못하였다.
<중 략>
지나간 20세기는 우리에게 수많은 전쟁이 남긴 심리적 트라우마티즘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풍부한 지식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사회적 폭력이 인간의 정신세계에 각인시킨 흔적의 치유에 대한 판단은 그렇게 낙관적이지 않다. 물론, 21세기에 들어서 과거와는 달리 사회적 폭력에 대한 ‘역사 바로 세우기’의 노력들이 전개되고, 수동적 또는 능동적으로 폭력에 맞서다 사라져 간 많은 희생자의 명예회복을 위한 물질적 보상작업, 기념사업 등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사회적 폭력이 인간의 발달에 끼친 심리적 트라우마티즘에 대한 진지한 인식과 치료적인 재활활동에 대한 노력은 여전히 “전쟁의 심리적 트라우마티즘”이라는 단어가 주는 생소함만큼이나 사회적 관심밖에 머물러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는 1950년 한국전쟁 피해자들에게는 물론이고 한국의 사회운동에 하나의 획을 그었다고 평가되는 1980년 5?18광주민중항쟁(이하 5?18)의 희생자와 그 가족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참고 자료
김동원, 국민이 보는 5.18, 광주사회조사연구소, 1998
김영택, 5월 18일 광주, 역사공간, 2010
김진경, 5.18 민중항쟁(역사 다시 읽기 3),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3
성문출판사편집부, 5.18 광주 광주, 샘물, 1999
최재천, 끝나지않은 5.18, 유스티니아누스, 1999
5.18광주민중항쟁유족회, 광주 민중항쟁 비망록, 남풍,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