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진남북조 시대의 동아시아 국제관계
- 최초 등록일
- 2013.04.23
- 최종 저작일
- 20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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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위진남북조시대의 조공책봉제도
주대의 봉건제도가 조공책봉제도의 기원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漢 초까지 조공책봉제도는 형성되지 않았다.1) 그 이유는 아직 중국에 외부에까지 영향력을 미치는 강력한 중앙집권국가가 출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진나라는 강력한 통일국가를 이루고 있었지만 황제의 직접적인 지배를 바탕으로 하는 군현제가 시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국내와 국외를 구분하여 적용할 수 있는 제도가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중국의 주변 민족이 아직까지 정치적 사회를 형성하지 못했던 것도 이유로 들 수 있다. 작위를 받을 만한 권력을 가진 군장도 없고 조공책봉질서에 속하여 세계를 구성할 수 있는 집단으로써의 내부적 완결체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漢 代에나 이르러서야 중국이 주변국들에 관작을 수여하고 조공을 받는 등의 조공책봉제도가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南北朝시대에 접어들면 다수의 이민족들이 中原에 진출하여 중화질서의 중심이 되고자 한다. 이렇게 五胡諸國이 난립함에 따라서 그 중심이 다수로 분산되었고, 五胡의 침입으로 인해 南遷한 東晉 또한 조공책봉제도의 중심이라는 기존의 지위를 상실하고 중국 대륙을 통일하려는 일개의 세력으로 잔존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주변의 외이제국들은 朝貢의 대상을 분명히 정할 수 없었고 설사 각 나라가 漢化정책을 추진하면서 각자의 중화사상에 입각한 조공책봉을 실행하였다 하더라도 이는 형식적일 수밖에 없었다.
참고 자료
김종완, 〈南北朝時代의 朝貢關係 槪觀〉,《震檀學報》61, 1986.
, 〈南北朝時代의 冊封에 대한 檢討-賜與된 官爵을 中心으로〉,《東亞硏究》19,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