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시해 사건 전모에 대한 요약
- 최초 등록일
- 2012.10.07
- 최종 저작일
- 20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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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명성황후 시해 사건 전모에 대한 요약
목차
1. 명성황후 시해 사건
2. 일본이 조선 왕후를 살해한 이유
3. 경북궁의 비극(만행의 현장)
본문내용
1. 명성황후 시해 사건
1895년 10월 8일 새벽 5시 30분경 서울의 경복궁에서는 세계사상 유례가 없는 만행이 일본의 군과 경찰, 정체불명의 민간인들에 의해 합동으로 자행되고 있었다. 주한일본공사 미우라의 지시하에 서울 주둔 일본군 수부대를 주요 무력으로 삼아 일본공사관원, 영사경찰, 신문기자, 낭인배 등이 경복궁을 침입하여, 민왕후(1897년 명성황후로 추존)를 살해하고 시신을 불태워버린 것이다.
이 사건은 19세기 말 항일의병이 봉기하는 원인이 되었고 이듬해 초에는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사태까지 몰고 왔다. 얼마 후 청년 김창수(백범 김구의 초명)가 일본군 밀정을 살해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한 것이나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사살한 중요한 계기도 바로 이 것이었다. 현재까지도 이 사건은 근대 일본제국주의의 대한침략을 상징하는 대표적 사건의 하나로 한국민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다.
<중 략>
그 과정에서 대응하던 궁궐 시위대병사 8~10명과 홍계훈(훈련대 연대장)이 희생되었다. 일본군의 습격은 북문으로부터도 있었다. 광화문쪽에서 총성이 울리자 이미 북서쪽의 문(추성문), 북동쪽의 문(춘생문)을 통과한 별도의 일본군이 북쪽의 문(신무문)을 공격해 들어갔다.
경복궁에서는 숙위중이던 시위대 교관 다이(William McEntyre Dye)와 연대장 현흥택의 지휘하에 비상 소집된 300~400명의 조선군 시위대 병사가 저항하였으나 무기의 열세로 곧 무너졌다. 이후 왕후의 거처에서 만행이 진행되는 동안 일본군은 사방의 출입구를 봉쇄하였다. 사복 차림의 일본인이 현장을 지휘하였고, 일본군 장교 2명이 이를 보조하였다.
당시 주한 영국 영사 힐리어(Walter C. Hillier)는 사건의 현장을 이렇게 보고하고 있다(1895. 10. 11)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