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니발과 스키피오 장군을 중심으로 한 포에니 전쟁사
- 최초 등록일
- 2012.10.07
- 최종 저작일
- 20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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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니발과 스키피오 장군을 중심으로 한 포에니 전쟁사와 나의 견해
목차
개요
1. 주요인물 정보
(1) 한니발
(2) 스키피오
2. 시대상황
(1) 초강대국 카르타고
(2) 로마의 성장
(3) 포에니 전쟁의 발생 원인
3. 포에니 전쟁
(1) 제1차 포에니 전쟁
(2) 제2차 포에니 전쟁
4. 필자의 생각
본문내용
1.주요인물정보
(1) 한니발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칸나에 전투로 명성을 크게 날린 이베리아 카르타고군 총 지휘관이다.
제1차 포에니 전쟁 때 시칠리아에서 용병대를 조직해 로마군을 집요하게 몰아붙여, 한때 로마를 패배 직전까지 몰고 갔던 카르타고 장군이 하밀카르 바르카스이다. 패전 후에는 전공을 시기한 정치인들을 피해 이베리아로 건너가(현 스페이 영토) 정복지를 넓히고 은광을 개발하기도 하며 카르타고의 손상된 국력에 보탬이 되고 있었다. 그러다가 기원전 229년 그만 암살당하는데, 배후에는 로마가 있었다. 그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맏아들이 바로 한니발 바르카스였다. 하밀카르는 어린 한니발에게 “네가 자라면 반드시 로마를 멸망시켜야 한다. 신과 아버지 앞에 맹세하거라.”라고 했다고 한다. 어린 한니발에게 로마는 아버지가 반드시 멸망시키고 싶어했던 나라요, 아버지를 죽인 나라였다. 그리하여 그가 기원전 221년에 26세의 나이로 이베리아의 카르타고군 총지휘권을 손에 넣자, 한니발은 4만의 병력으로 피레네산맥을 넘고, 갈리아를 통과, 다시 알프스산맥을 넘어 이탈리아 북부로 침입으로 제2차 포에니 전투가 시작되었다.
<중 략>
이탈리아에서의 연전연승
이탈리아에서의 첫 번째 큰 전투인 트레비아 전투에서 로마군은 동원된 4만 중 3만에 가까운 병력을 잃고 대패하였다.
트라시메노의 대패 이후 집정관으로 선출된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싸움을 지연시키는 소모전을 통해 상대편을 지치게 하는 전술을 펼쳤다. 훗날 서양전술사에서는 이와 같은 전술을 그의 이름을 따 파비우스식 전술(Fabian Strategy)이라고 불렀다.
이때 로마군은 스키피아가 이끄는 군이 한니발의 본거지인 지금의 에스파냐 북부를 다시 차지하였고 이 때문에 한니발이 히스파니아로부터 원군을 받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졌다. 로마 의회는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Gaius Flaminius)를 새 집정관으로 뽑아 군의 지휘권을 주었다. 플라미니우스는 트레비아에서 살아남은 병력과 새로이 동원된 네 개 군단을 합쳐 약 4만의 병력으로 북쪽으로 진군하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