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청주지역 조사
- 최초 등록일
- 2012.07.16
- 최종 저작일
- 20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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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왕조실록을 중심으로 조선중기까지의 청주에 대해 조사한 것입니다.
목차
1. 지역, 시기 선정
가. 청주를 선정한 이유
나. 조선 중기까지를 살펴보게 된 이유
다. 글의 전개방향
2. 청주의 연혁
3. 당시 청주의 상황과 문제
가. 조선 초기
나. 조선 중기
4. 청주지역의 당시 상황과 문제
본문내용
1.1. 청주를 선정한 이유
이 글에서 살펴볼 지역은 청주다. 청주는 ‘충청도(忠淸道)‘라는 말의 어원이 될만큼 조선시대에 중요한 도시였고, 지금도 충청북도의 주도(州都)로서 충청북도의 중심이 되는 도시다. 따라서 충청북도의 주요도시인 청주에 대해 살펴보기로 했다.
1.2. 조선 중기까지를 살펴보게 된 이유
조선 후기의 기록은 많이 남아있기 때문에 살펴보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조선 중기까지의 기록은 임진왜란 등을 거치면서 많이 사라졌고, 또 시간이 오래되어『조선왕조실록』등의 기록밖에는 전해지지 않는다. 따라서 태조때부터 선조때까지의『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청주의 모습을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고 여겼다.
1.3. 글의 전개방향
이 글에서는 우선 조선 중기까지의 청주의 연혁에 대해 간단하게 살펴본 뒤, 조선 전기와 중기의 상황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것은 거의『조선왕조실록』을 바탕으로 살펴보게 될 것이다. 당시의 중요한 사건을 중심으로 청주의 상황을 살펴본 뒤, 마지막에 청주에 대해 살펴본 결과를 종합해보고자 한다.
1. 청주의 연혁
청주(淸州)는 삼한시대에 마한의 땅이었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상당현(上黨縣)이었는데, 일명 낭비성(娘臂城) 또는 낭자곡(娘子谷)이라고도 하였다. 삼국통일 뒤 685년(신문왕 5)에 청주에는 서원소경(西原小京)이 설치되고, 757년(경덕왕 16)에는 서원경(西原京)으로 개칭되어 정치·군사상의 요지였음이 행정구역에도 반영되어 있다. 고려초인 940년(태조 23)에 청주(靑州, 뒤에 淸州로 바뀜)로 이름이 바뀌고, 983년(성종 2)에 전국에 12목(牧)을 둘 때 청주목으로 승격되었다. 995년(성종 14)에는 전절군절도사(全節軍節度使)가 파견되었다가 1012년(현종 3)에 안무사로 바뀌었다. 1018년에 전국에 8개 목(牧)을 설치함에 따라 다시 청주목이 되고, 양광도(楊廣道)에 소속되었다. 1310년(충선왕 2)에 청주는 주(州)로 강등되었다가, 1356년(공민왕 5)에 다시 목으로 복구되었다. 조선시대 세종(世宗)은 한때 관찰사를 두었으나, 세조(世祖)는 진(鎭)으로 격을 낮추어 도호부를 설치하였고 선조(宣祖)가 청주목으로 승격시켜 2군 9현을 관할하게 하였다. 조선시대에도 청주목이 유지되면서 청주는 충청도의 정치·행정의 중심지가 되었다.
참고 자료
태백산 사고본『태조실록』
디지털 청주문화대전
http://cheongju.grandculture.net/Contents/Index?contents_id=GC00202437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청주’항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do?docid=b20c2629b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