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품의 나라, 신라
- 최초 등록일
- 2012.01.26
- 최종 저작일
- 20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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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골품제도는 처음에는 왕족을 대상으로 한 골제(骨制)와 일반 귀족을 대상으로 한 두품제(頭品制)가 별도로 나뉘어 있었다. 그러나 법흥왕 때 이를 하나의 체계로 통합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 성골과 진골 외에 여섯 등급을 두었으니 신라의 지배층을 모두 여덟 등급으로 나눈 셈이다.
목차
골품의 나라, 신라
1. 설계두의 꿈
2. 골과 품이 지배했던 신라
3. 진골도 다 같은 진골이 아니다.
4. 속치마도 못 입게 하다니
5. 차라리 승려의 길을
본문내용
1. 설계두의 꿈
645년 당나라 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했을 때였다. 당나라 군대보다 앞서서 고구려군 깊숙이 들어가 싸우다가 전사한 외국이이 있었다. 그는 최고의 공을 인정받았다. 그때 당나라 태종은 외국인이면서 당나라를 위해 죽었으니 그 공을 갚을 길이 없다는 말까지 하였다.
머나먼 이국의 땅에 가서 당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은 설계두, 그는 왜 조국 신라를 떠났을 까? 그는 무엇을 찾아 당나라로 떠났을까? 일찍이 설계두는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당시 신라 사회에 대해 이렇게 불만을 털어놓았다.
“신라에서는 사람을 쓰는 데 골품을 따진다. 정말 그 족속이 아니면 비록 큰 재주와 뛰어난 공이 있더라도 그 벽을 넘지 못한다. 내가 원하는 것은 멀리 중국에 가서 세상에 없는 지략을 발휘하고 비상한 공을 세우는 것이다. 그래서 내 스스로 영화의 길을 열고 싶다. 고관의 옷에 검패(劍佩)를 갖추고, 천자(황제)의 곁에 출입하였으면 좋겠다.”
결국 그는 621년 신라를 몰래 떠나 당나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당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하자 자원 입대를 하여 비상한 공을 세웠다. 그렇지만 부귀영화를 누리지는 못한 채 죽고 만 것이다.
2. 골과 품이 지배했던 신라
신라의 영토에는 애초에 여러 작은 나라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신라는 이들 나라들을 정복하고 합치면서 고대국가로 발전해갔다. 이 과정에서 복속된 지역의 지배층을 신라의 귀족으로 삼았다. 골품제도는 이들 귀족 세력들을 재편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였다. 즉 골품제도는 본래 경주를 중심으로 하는 중앙의 지배층만을 염두에 둔 신분제도였다고 할 수 있다.
참고 자료
영화처럼 읽는 한국사, 젊은역사연구모임, 명진풀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