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몽유적지 기행문
- 최초 등록일
- 2011.01.30
- 최종 저작일
- 20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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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몽유적지 기행문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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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제주 항파두리 항몽유적지 기행 [濟州 항파두리 抗蒙遺蹟址 紀行]
“역사의 관점이란 누가 그것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많이 달라집니다.”
제주 북제주군 고성리 항파두리 항몽유적지를 찾아 관리소장께 물었다. 삼별초의 대몽항쟁에 대한 성격을 ‘몽골에게 대항한 자주적인 국가수호’인가? 아니면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었나?’ 이 둘 중 어느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느냐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항몽유적지는 삼별초가 여몽연합군에 최후까지 항쟁하다 최후를 맞은 곳이다. 그곳을 찾는 날은 매미가 우는 봄이었다. 화창하다 못해 햇빛이 내려쬐어 무덥다는 느낌을 받았다. 항몽유적지는 접근성이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라 ‘이런 날씨에 이곳을 찾는 관광객이 있을까?’ 라는 궁금증을 가지며 유적지로 들어갔다. 후에 그곳에 가서 물어보니 수학여행단과 일부 단체관광객을 제외하고는 거의 방문객이 없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 속을 둘러싼 경치를 보며 역사적 시각을 바탕으로 이곳이 역사 학습의 현장으로 개발되어진다면 좋은 역사의 배움터가 될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럽의 유적지들은 현재 단지 전시뿐만 아니라 그 시대와의 교감을 이룰 수 있게 개발되어 많은 외국 관광객들이 찾는다고 한다. 유럽여행은 대학생들의 꿈이라고 하지 않는가. 단지 보수하고 역사를 위해 유적지를 찾아주세요 라고 말하는 우리의 유적지들은 보며 아쉬움을 느꼈다. 또한 제주도에 살며 그 지역의 유적지에 대한 관심이 없었던 나 자신 스스로에게 비난의 화살을 쏘았다.
예전의 토성이었다지만 그 곳은 그리 크지 않았다. 복구가 아직 덜 되어 있어 볼거리가 그리 많지 않다는 표현이 맞는 말이겠다. ‘본래 토성(높이 5m, 너비3.4m)은 총길이 6km에 이르는 외성을 쌓고 안에 다시 석성으로 800m의 내성을 쌓은 이중 성곽이었으며, 각종 방어시설뿐 아니라 궁궐과 관아까지 갖춘 요새였다.’고 한다.
항몽유적지와 관련한 순의비, 순의문, 항목유적유물관들은 거의 대부분 1976년에서 1978부터 착수된 사업들이다. 이것들의 의의는 삼별초의 난을 왕권에 대항한 반역으로 보기보다는 고려의 자주적 국가수호를 위한 대몽항쟁의 관점으로 보아 그 뜻을 높이 기르는데 있다. 1970년대는 군사정권의 시대. 삼별초는 무신정권의 군대. 무엇을 뜻할까? ‘1970년대 군사정권의 역사적 정통성을 기르기 위해 항몽유적지는 그때부터 건설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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