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눌의 생애와 사상
- 최초 등록일
- 2010.07.12
- 최종 저작일
- 20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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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지눌의 생애와 사상입니다 ^^
목차
Ⅰ. 들어가며
Ⅱ. 지눌의 생애
① 깨침을 향한 수학(修學)시대
② 스승으로서의 생애
Ⅲ. 지눌스님의 사상
① 돈오점수(頓悟漸修) 사상
② 정혜쌍수(定慧雙修)
③ 간화선(看話禪) 사상
④ 선교(禪敎)의 융회(融會)
Ⅳ. 나가며
본문내용
Ⅰ. 들어가며
죽음이란 삶의 총결산이기 때문에 한 사람의 삶이 어떠하였는가는 그 사람의 죽음의 장면을 보면 알 수 있다. 역사적으로 위대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의 죽음은 그들 삶의 질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데 보조국사 지눌의 생의 마지막 장면 또한 그가 어떠한 삶을 살았는가를 잘 보여준다. 「불일보조국사비명」에 의하면 그는 타계하던 날 새벽 목욕재계하고 법당에 올라 향을 사루고 큰 북을 쳐 송광사 내 대중을 법당에 운집시켰다. 그리고는 육환장(六環杖)을 들고 법상(法床)에 올라 제자들과 일문일답으로 자상하게 진리에 대한 대담을 계속하였다. 마지막으로 한 제자가 [옛날에는 유마거사가 병을 보이었고 오늘은 스님께서 병을 보이시니 같습니까 다릅니까.]라고 물었다. 같은가[同] 다른가[別]하는 질문은 선가에서 진리를 시험해 보는 질문이다. 임종이 가까운 스승께 이러한 날카로운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것은 오직 진리의 세계에서만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여기에 대하여 지눌은 육환장을 높히 들어 법상을 세 번 내리친 다음 [일체의 모든 진리가 이 가운데 있느니라]하고는 법상에 앉은 채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이때가 1210년 3월 27일 그의 나이 53세였다. 그의 생의 마지막 장면은 최후의 순간까지 제자들과 진리에 대한 가르침으로 일관하신 불타의 입멸 장면을 연상하게 한다. 그는 진리 속에 살다가 진리 속에 간 영원한 스승이다.
Ⅱ. 지눌의 생애
지금으로부터 약 840년 전인 고려 중엽 제18대 의종 12년(1158) 황해도 서흥군에서 당시 국학(國學-지금의 대학 및 대학원과 같은 기관으로 신라 및 고려에서 쓰던 이름. 조선시대의 성균관)의 학정(學正-국학 및 성균관 안에서 종사하는 정 8품의 벼슬)인 정광우를 아버지로 부인 조씨를 어머니로 하여 태어났으나, 태어날 때부터 허약한 고병이 잦아 백방으로 약을 썼으나 효험이 없었다. 부친은 부처님 전에 맹세하기를 "병만 나으면 자식을 부처님께 바치겠으니, 병만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다. 이후 아이의 병은 깨끗이 나았고, 이리하여 아이는 나이 겨우 여덟살 되던 해에 부모가 정해준 대로 조계(曹溪-六祖 혜능을 지칭)의 먼 제자인 종휘(宗暉) 선사에게 의지하여 출가하였으니, 그가 바로 후에 한국불교의 중흥조로 칭송 받고 있는 목우자(牧牛子) 지눌(知訥)스님이다.
그의 생애는 41세때 (198) 지리산 상무주암에서의 깨침을 중심으로 그 이전과 이후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 이전의 생애가 고려불교의 타락상에 대한 깊은 인식과 그를 바로잡으려는 정열이 깨침을 향한 줄기찬 정진으로 승화된 기간이었다면 깨침 이후의 삶은 한국불교의 정도(正道)를 모든 사람을 위하여 펼친 자비의 실천기간이었다.
않음을 아나니 그 때문에 돈오라 한다.
참고 자료
강건기, 「지눌」, 예문서원, 2002.
길희성, 지눌의 선사상, 소나무, 2001.
김형효 외, 「知訥의 사상과 그 현대적 의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6.
朴鐘鴻, 「韓國思想史-佛敎論-」, 서문당, 1972.
宋天恩, 「知訥의 禪思想」, 韓國佛敎思想史 3, 圓光大學校 出版局, 1974.
李能和, 「朝鮮佛敎通史」, 新文館, 19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