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보] 연암 박지원의 생애
- 최초 등록일
- 2010.01.16
- 최종 저작일
- 20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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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서울에서 연암을 만나다`라는 주제로 수업시간에 제출했던 과제입니다.
서울에서의 연암 박지원 생애를 연보(년도별로)로 조사한 자료입니다.
열심히 준비했으니깐 많은 이용 바랍니다^^
목차
- 10대까지
- 20대까지
- 30대까지
- 40대까지
- 50대까지
- 60대까지
본문내용
1737년 음력 2월 5일 반남 박씨 박사유와 함평 이씨 사이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한양 서쪽 반송방 야동(冶洞, 지금의 서울시 서대문 아현동쯤으로 추측)에서 아버지 사유(師愈, 1703-1767)와 어머니 함평 이씨의 2남 2녀 중 막내로 2월 5일 축시에 출생.
휘는 지원, 자는 중미, 호는 연암이었다. 조부 필균(弼均)은 경기도 관찰사, 지돈녕 부사를 지냈으며 선조 때의 명신인 박소(朴紹) 이후 대단한 명문가였다.
▲ 10대까지
1739년(3세)
형 희원이 장가를 가고, 형수는 이씨로 16세에 시집와서 어린 연암을 잘 돌보았다.
1741년(5세)
경기도 관찰사를 제수 받은 조부를 따라갔다가 한번 본 감영의 모양과 칸수를 말하였다.
1752년(16세)
관례를 올리고 유안재 이보천의 딸과 혼인했다. 장인 유안재에게 《맹자》를 배우고, 처숙인 홍문관 교리 이양천에게 문장 짓는 법을 배웠다. 연암이 ‘항우본기’를 모방하여 ‘이충무전’을 지었는데, 반고와 사마천과 같은 글 솜씨가 있다고 크게 칭찬받았다.
▲ 60대
1796년(60세)
안의현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우려 하자 자기 뜻을 몰라서 하는 일이라며 크게 꾸짖고, 세우지 못하게 했다. 안의현감 임기가 끝나 서울로 돌아왔다. 종로구 계동에 벽돌을 사용하여 계산초당을 지었다. 아들 박종채가 머물렀고, 손자 박규수가 이곳에서 태어났다. 제용감주부에 임명되었다가 의금부도사로 전보되었다. 벗 유언호가 67세로 죽었다.
▲ 종로구 계동의 위치
1797년(61세)
7월, 면천군수에 임명되자 임금을 알현하게 되었고, 이때 문체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나누었다. 정조의 명령으로 ‘서이방익사書李邦翼事’라는 글을 쓰게 됐다.
1799년(63세)
참고 자료
연암 박지원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본 실학자), 배봉기저, 산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