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합론의 역사 창시자 칸토어
- 최초 등록일
- 2009.10.23
- 최종 저작일
- 20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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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집합론의 역사 창시자 칸토어
목차
집합론의 창시자 칸토어
1. 칸토어 집합의 정의
2. 칸토어 집합은 크기가 0이면서 셀 수 없는 집합
3. 칸토어 집합의 위상적 성질
4. 칸토어 집합과 프랙탈
5. 일반적인 칸토어 집합
본문내용
칸토어(Georg Cantor : 18451918)는 1845년에 러시아의 페테스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칸토어의 아버지는 덴마크 출생이었는데 러시아에 옮겨와 살다가 칸토어가 11살 때 독일로 다시 이사했다. 이러한 이유로 나중에 칸토어가 유명해졌을 때, 이들 세 나라에서 서로 자기 나라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칸토어의 가장 큰 업적은 당시의 수학자들이 금기시했던 무한집합을 문제삼아 무한의 개념을 밝히고, 더 나아가 무한 중에도 여러 단계가 있다는 것을 수학적으로 설명했다는 것이다. 물론 칸토어 이전에도 ‘무한’이라는 말이 사용되기는 했다. 그러나 ‘무한’은 인간이 셈할 수 있는 한계를 초월한다는 의미로나 쓰였을 뿐 학문적인 연구가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신만이 ‘무한’하다고 생각한 당시의 사람들에게 무한에 대한 연구는 신을 모독하는 행위로 여겨졌던 것이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무한의 수학’인 『집합론』을 연구하던 칸토어는 놀라운 무한의 성질을 밝혀 내고는 스스로도 10년간이나 확신과 회의를 반복하다가 29세 때인 1874년에 집합론을 발표하였다. 『집합론』이 세상에 처음 발표되었을 때, 곧 수많은 비난이 쏟아졌다. 칸토어의 이론을 가장 맹렬히 비난한 사람은 다름 아닌 칸토어의 지도 교수였던 크로네커(Leopold Kronecker : 1823~1891)였다. 크로네커는 칸토어가 정신 질환까지 앓게 될 만큼 철저하게 칸토어의 이론을 배척하고 심지어 그의 앞길까지 막았다.
『집합론』이 발표된 이후 쏟아진 너무나 거센 반대와 비난을 이기지 못한 칸토어는 40세 때인 1884년부터 정신병 증세를 보여 발작을 일으키곤 했으며 그때마다 정신 병원에 입원하곤 했다. 그의 말년에는 『무한집합론』이 세상의 인정을 받고 크로네커와도 화해했다고 하나 그는 끝내 정신 병원에서 쓸쓸한 최후를 맞았다.
정신 이상까지 일으켰지만 칸토어의 수학은 이후 20세기에 모든 수학의 기초를 집합론 위에서 새로 다지도록 만드는 엄청난 영향을 끼치게 된다. 당시 유럽의 사상계를 지배하던 권위적인 견해와 새로운 것을 일단 거부하는 세계에 맞섰던 칸토어는 그의 논문 속에서 “수학의 본질은 자유에 있다.”라고 주장하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