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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석제,『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발제문
    성석제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20140255 정은주1. 작가 소개(1) 생애소설가 성석제는 1960년 7월 5일, 경상북도 상주에서 태어났다. 중학교 2학년 때, 서울 가리봉동으로 전학을 갔으며 이후, 혜화동의 경신고등학교에 입학한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문예반에서 활동하였으며 1979년, 연세대학교 법학과에 진학 후에는 기형도와 함께 ‘연세문학회’에 가입한다. 군제대 후, 교내 ‘윤동주문학상’ 시 부문에서 가작을 받음을 시작으로 ‘박영준문학상’에 소설이 당선으로 뽑히기도 하였다.그리고 1986년, 『문학사상』에 시 「유리 닦는 사람」을 발표하며 정식으로 등단하였다. 1991년에는 그 동안 썼던 시를 모아 삶의 근원과 존재의 근본에 대한 탐구인 『낯선 길에 묻다』라는 이름의 첫 시집을 내기도 하였다, 1994년,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라는 소설집을 발표하였으며 그 이후인 1995년에 여름호 단편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를 발표하며 본격적인 소설가의 길로 들어섰다.그 외에도 전(傳)의 형식을 차용한 『아빠 아빠 오, 불쌍한 우리 아빠』(1997), 술판과 노름판 등에서 벌어지는 인간사와 인간의 속성을 그린 『홀림』(1999) 등의 소설집을 간행한 바 있다. 또한 산문집 , 명문장 모음집 , 음식 에세이 , 등을 발표했다.1997년 제30회 한국일보문학상(수상작 '유랑'), 2000년 제13회 동서문학상(수상작 '홀림')을 수상했고, 단편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로 2001년 제2회 이효석문학상과 2002년 제33회 동인문학상을 받았다. 이후 단편 '내 고운 벗님'이 2003년 제49회 현대문학상을, 단편 '잃어버린 인간'이 2005년 제13회 오영수문학상의 수상작에 선정되었다.성석제는 해학과 풍자, 과장, 익살을 통해 인간의 다양한 국면을 그려내는 작가로 알려져 있으며 희비극을 넘나드는 자유로운 서사와 독창적인 문체로 현재까지도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2) 작품경향시로 등단하여 소설가의 길을 걷는 성석제의 소설은 실험적이라고 평가되기도 한다. 그의 첫 소설인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1994)는 단편보다도 짧은 엽편 소설이다. 이에 문혜원은 “시와 소설의 중간 형태의 글쓰기”였다고 말하기도 한다. 성석제는 이 소설집에서 자전적 성격을 띤 문체 위에 현실을 뒤집는 허구를 적절히 배치하여 현실과 허구사이에 아슬아슬한 밀고 당기기를 시도한다. 이렇듯 상상과 현실을 오가며 그럴듯한 거짓말을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성석제 소설의 특징이다.1995년에 발표한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는 그가 소설계에 이름을 알리는 결정적인 작품이다. 이 소설에서 그는 성석제 소설에서 회자되는 “이야기꾼”의 목소리를 톡톡히 알린다. 주인공도, 작가도, 관찰자도 아닌 의문스러운 제 3자의 해설. 성석제의 새로운 소설시점은 그의 입담이 더해져 평단과 독자 모두에게 “재미있는 소설”을 각인시키는 역할을 한다. 최근에 그는 중편과 장편을 연이어 발표하여 그의 서사 구성력이 다양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증명해 보였다.또한 문장, 음식, 사찰문화, 여행, 독서 등 다양한 주제의 에세이와 산문집을 발간하며 이 시대의 멘토로 입지를 굳히고 있다. 성석제의 소설은 문체, 시점, 소재, 기법, 구성, 인물 등 각 요소들이 골고루 연구되며 혁신적인 소설로 평가되고 있다.2. 서사내용 정리[1]‘황만근이 없어졌다’라는 문장으로 내용이 시작된다. 황만근은 농민부채 탕감을 위한 궐기대회 날, 고장난 경운기를 끌고 국도로 나갔으나 돌아오지 못한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황만근의 행방에 대해 모여서 이야기 한다.[2]황만근은 마을에서 바보라고 불렸다. 마을 사람들은 분뇨를 퍼내면서, 소꿉장난을 하면서, ‘황만근가’를 중얼거리면서 하루만에 그의 부재를 모두 느끼게 된다. 그러나 누구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지는 않는다.[3]‘황만근가’에는 황만근의 일생이 녹아 있으며 그의 이름은 동네를 뿌리를 상징하였다. 황만근은 어릴 적부터 자주 넘어졌으며 혀도 짧아 사람들에게 점점 더 바보취급 당하였다.[4]그의 젊은 어머니는 열댓살에 황만근을 낳았고 과부가 되었다. 어머니와 황만근을 보살펴주던 할머니마저 돌아가신 후에는 황만근이 어머니를 봉양하게 된다.[5]신체검사를 다녀오던 황만근은 토끼 귀신을 만나게 되는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된다. 3년 후, 자살하려던 처녀가 황만근의 집에 들어오게 되고 그녀는 황만근에게 경운기를 가르쳐준다.[6]일곱 달 후, 처녀는 황만근의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동네에 흉흉한 소문이 돌게 되었고 처녀는 아이를 낳은 지 삼칠일 되던 날, 사라져버렸다.[7]황만근은 아이를 업고 젖동냥을 하며 키웠고 유난히 식탐이 많은 아이를 위해 하루 일이 끝나면 경운기에 고기를 매달고 돌아왔다. 황만근은 술을 좋아했는데 자리를 가리지 않고 잠드는 버릇 탓에 아이가 철이 든 후에는 아버지를 부축하고 집에 데려오는 게 일이 되었다.[8]이장이 궐기대회 때문에 방송으로 주민들을 모은 날, 민씨는 이장과 황만근의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된다. 이장은 황만근에게 앞장서라고 말한다.[9]민씨는 황만근과 같이 길을 걷게 되고 그와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황만근이 마지막으로 남긴 “농사꾼은 빚을 지마 안된다 카이”라는 말을 다음 날 기억해낸다.[10]일주일 뒤, 황만근은 항아리 속에 담겨 돌아왔다. 혼자 경운기를 타고 군청에 다녀온 그는 사고를 당하게 되고 비를 맞으며 경운기를 지키다 생을 마감한 것이다. 민씨는 그에 대해 ‘하늘이 내고 땅이 일으켜 세운 사람’이라고 평한다.8. 주제“황만근과 마을사람들의 대비를 통해 이해타산적인 현대인의 모습 고발”성석제가 2000년에 발표한 는 농촌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약간 모자라는 인물인 황만근의 생애와 그의 행적을 해학적인 문체로 그려 낸 소설이다. ‘황만근’의 일생 동안의 행적을 기술하고 이에 대해 논평하는 점에서 ‘전(傳)’의 양식과 유사한 면을 띠기도 한다. 평소 마을 사람들에게 바보 취급 당하던 황만근의 죽음을 통해 농촌 사회의 척박한 삶과 사람들의 이기적 태도를 비판하고 있다. 또한 선량한 소시민이었던 황만근과 마을 사람들을 대조시키며 이해타산적인 현대인의 모습을 날카롭게 꼬집어 냈다. 민 씨라는 인물을 등장시켜 그를 이해하는 모습도 보이고 있다.황만근민 씨마을 사람들이해, 동정무시자기희생‘그러나 황만근만은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모든 사람이 그의 부재를 알게 되었다. 그렇지만 누구도 적극적으로 황만근을 찾아나서려 하지 않았다.’
    인문/어학| 2016.04.28| 4페이지| 2,000원| 조회(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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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 드 모파상 보석
    기 드 모파상 의 논제국어국문학과 20140255 정은주논제1. 자신의 경제적 형편을 넘어서는 취미를 갖는 것은 옳은가? 아닌가?작품 내에서 랑탱부인은 연극을 보러 다니는 것을 좋아하며 가짜 보석을 모으는 것이 취미이다. 그러나 그들의 살림은 결코 풍족한 편이 아니다. 그런 살림 내에서 랑탱부인은 비교적 호사스런 취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남편인 랑탱이 흠으로 꼽기도 한다. 랑탱부인처럼 자신의 경제적 형편을 넘어서는 취미를 갖는 것은 옳은가? 아닌가?논제2. 아내의 부정을 알았음에도 랑탱이 돈을 소유한 것은 옳은가? 아닌가?*랑탱부인의 외도를 전제하였습니다.극 중에서 랑탱은 죽은 아내를 잊지 못하며 슬퍼하다가 생계를 이어나갈 수 없어 그녀의 가짜보석을 팔러 간다. 그런데 보석상에서 알게 된 놀라운 사실은 그 보석들이 전부 비싼 값의 진품이라는 점이다. 그동안 랑탱이 몰랐던 그녀의 부도덕한 행태에 대해 알게 되어 충격을 받았지만 랑탱은 그 보석을 팔아 자신이 소유한다. 아내의 부정을 깨닫고서도 그 결과물인 보석들과 그것들을 판 돈을 자신이 소유한 랑탱의 행위는 과연 옳은 것일까? 자신이 소유함으로써 아내의 그러한 행위를 묵인하는 셈 아닐까?논제3. 돈을 소유한 랑탱은 행복한가? 아닌가?결과적으로 보면 랑탱부인은 죽음 후에도 값비싼 보석들로 랑탱을 내조하였다. 일개 공무원이었던 랑탱의 신분으로는 결코 만질 수 없는 커다란 돈을 갖게 된 것이다. 또한 재혼한 여자는 배우자로서 행실이 매우 올곧은, 전 부인과 반대의 모습을 띤다. 그러나 랑탱의 인생은 매우 불행해졌다고 한다. 랑탱은 많은 돈을 소유하게 되었음에도 왜 불행해졌을까? 돈 대신 랑탱이 잃은 것은 무엇인가? 랑탱이 돈을 소유하지 않았다면 그는 행복했을까?
    인문/어학| 2016.04.28| 1페이지| 2,000원| 조회(1,0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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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붕구「실존주의 문학」
    김붕구, 실존주의 문학국어국문학과 20140255 정은주-실존주의 문학‘실존주의’문학을 논한다는 것은 참 곤란한 일이다. 개념을 또 한 번 개념어로 번역하는 것은 별로 승산이 없다. 어느 작가와 작품, 또 그것을 통하여 그 시대의 문학에 대해 구체적인 문제를 같이 느끼고 생각하며 참여까지 이끌어내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고 본다. 현대문학은 ‘실존철학’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는 현대문학의 가장 특징적이고 지배적인 성격이다. 이는 전 세기의 문학과도 뚜렷이 구별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넓은 의미의 실존문학, 좁은 의미의 실존문학. 두 가지 범주를 다룰 것이다.-넓은 의미의 실존문학실존철학, 실존문학의 등장 전에는 ‘행동주의’가 성행하였다. 행동주의는 절망에서 출발하였지만 문학사상에 획기적인 전환을 가져왔다. 문학을 넓은 세계로 해방시켰으며 끊임없이 인간의 근본조건과 운명에 대면하도록 하였다. 또 인간 총체에 대한 산 ‘증언’이 될 수 있다. 이 때까지의 문학은 인간을 정적인 면에서만 파악하는 측면이 있었다. 로망티즘, 자연주의, 신심리주의 등이 이에 해당하며 잠깐의 새로운 맛을 주었을 뿐이다.이러한 상황에서 실존문학은 현실과 의식의 긴장된 대면에서 자기의 영토를 발견하였다. 실존문학은 허망한 인간조건에 대한 집념과 불안, 공허에 있어 적절한 진단을 내렸으며 철학의 이름으로 인간의 존재에 대하여 병리학적으로 구명해주었다. 그렇기에 실존문학은 그 사물을 지각하는 인간의 그것과 그 의식의 구조를 분석해 보이는 것이다.실존문학은 두 갈래로 갈릴 수 있다. 첫 번째는 기독교적인 방향이며 두 번째는 유인최귀의 입장이다. 유인최귀란 인간 위에는 인간을 초월한 어떠한 존재도 없다는 것이다. 사상적으로 ‘실존주의’가 표면화하기 이전은 무언가 공통적인 분위기가 강렬히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발견으로 인해 현대적 작품과 고전적 작품의 사이가 뚜렷이 선이 그어질 수 있었고 철학(병리학적 분석과 진단)이 문학의 영역으로 넘어오게 되었다.-좁은 의미의 실존문학사르트르는 자신의 견해에 대해 이러한 입장을 밝힌다. 사물들은 그 자체로서 충족한 존재이며 ‘건드릴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런데 인간의 존재는 자꾸만 외부에서 건드림을 받으며 이는 매우 거북하다. ‘의식’이란 자기 자신에게 관여하는 존재이다. ‘나’는 어떠한 관념으로도 일반화할 수 없는 구체적 존재이며 어떠한 정의 속에도 가둘 수 없는 주체적이고 내면적인 존재이다. 까뮈는 종교를 언급했다. 종교와 부르조아 휴머니스트, 양자 모두 인간존재 자체를 검토함으로서 이성의 단층에 부딪쳐 좌절을 겪었다. 여기서 이만 주저앉거나 뛰어넘거나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까뮈의 이런 종교적 발언은 사르트르가 비종교적이고 산문적인 것과 대조된다. 그러나 이들은 종교를 거부함에도 불구하고 끝내는 종교적 집념과 모색 속에 번민하는 자들이다.
    인문/어학| 2016.04.28| 2페이지| 2,000원| 조회(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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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화「의도와 작품의 낙차와 비평」
    임화「의도와 작품의 낙차와 비평」-특히 비평의 기능을 중심으로 한 감상-국어국문학과 20140255 정은주Ⅰ내용 정리예술가는 분명 작품을 만들 때 의도를 가지고 만들 것이다. 그러나 완성된 작품에는 꼭 그가 의도하지 않았던 바가 나타나 있으며 그것이 바로 작품과 작가 사이를 갈라놓는 ‘잉여물’인 것이다. 의도가 작가의 지성이라면 잉여물은 작가의 감성이다. 대개 직관세계는 지적 세계의 대립물로 등장하며 작가의 창작과정은 그 두 가지가 갈등하는 심리적 영역이다.지성과 감성에도 순서가 있다. 감성계는 언제나 새롭지만 지성계는 그에 비해 낡았다. 그렇기 때문에 창작을 하며 나타나는 갈등 중에는 시간적 대립과 함께 신과 구의 충돌도 있다. 한 작품의 잉여의 영역에는 이러한 충돌들이 만들어 낸 새로운 세계가 있으며 이것은 사실 작가가 목적했던 진정한 예술적 대상일 수도 있다.잉여의 세계란 작가의 직관 작용이 초래한 현실이 스스로 만들어 낸 질서 자체이다. 단지 작가에 의해 의식되지 않았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직관 이상으로 세계에 대한 새로운 관념 체계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작가의 작품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 중으로 작가에 의하여 의도되고 합리적인 작품의 필연한 결말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형식적 구조 안에 담긴 것이 아니라 작품 현실로부터 새어나와 있다.하나의 작품을 읽을 때 작가의 의도가 아닌 또 하나의 핵심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극소수의 우수한 감수력을 지닌 독자만이 가능한 일이며 이 단계에 접어들면 단순히 작품을 향수하는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 ‘비평’의 영역이 열리는 것이다. 그러나 비평의 창조는 문학작품의 창조와는 다른 한계가 있다. 작가는 광활한 현실 가운데서 새로운 예술세계를 창조해내지만 비평가는 이미 만들어진 작품 내에서 미지의 영역을 파헤치는 것이다. 그래서 작품이 끝나는 곳에는 비평이 존재한다.남의 작품을 가지고 어떠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느냐는 비평가에게 허용된 진실한 자유의 천지이다. 그것이 비평의 독자성인데 재료가 되는 작품이 아무런 가치도 제시하지 못한다면 비평의 창조는 성립하지 않는다. 작품에 있어서 작가의 의도를 넘어서는 ‘잉여의 영역’은 비평의 세계와 긴밀한 관계가 있다. 비평은 잉여의 세계를 작품으로부터 분리하여 독립적 가치를 승인하고 더 나아가 그 존재와 성장의 가능성을 증명하는데 일조한다. 비평가는 작가와 대립한다고 볼 수도 있으나 사실은 작품 내의 잉여영역 원천인 현실 가운데서 다 같이 제 세계를 함께 창조하는 것이다.
    인문/어학| 2016.04.28| 2페이지| 2,000원| 조회(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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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청준, 지배와 해방
    지배와 해방-언어사회학서설③-20140255 정은주1. 요약「‘왜 글을 쓰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은 글 쓰는 사람의 동기와 욕망에서부터 시작 된다…. 」지욱은 출판회관 강연장에서 이정훈이라는 젊은 소설가의 강연을 녹음해 와서 다시 듣고 있는 중이다. 그는 말에 대한 사람들의 무책임을 느꼈고 그에 대한 환멸로 인해 ‘말들의 집단수용소’를 차리게 된다. 말들을 가두어 두었다가 나중에 필요할 때가 오면 그 말에 대한 책임을 지게 하자는 것이다. 그 후, 그는 말의 잔치가 열리는 모임을 쫓아다니며 녹음기에 담아왔다. 사람들의 말이 담긴 테이프를 책상 서랍 속에 감금시켜두며 그가 할 수 있는 책임을 감당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이정훈의 ‘왜 쓰는가?’라는 강연은 꽤 흥미로운 것이었다. 지욱은 희망을 느끼며 이정훈의 강연에 참석한다.「사람들은 작가에 대해 ‘그만의 문학관이 있으며 재능을 구비한 완성된 작가’라고 기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작가로 불리고 안 불리는 것은 사회풍속에 의한 외형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가 작가가 되기 이전에 어떤 동기에서 글을 생각하게 되었는지부터 차근차근 풀어나가야 한다. 먼저, 자신의 생각을 글로 적는 최초의 형식은 일기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자신만을 위한 글이다. 다음으로, 누군가가 읽어줄 것을 전제로 한 글의 최초의 형식은 편지이다. 이는 일기와 동일한 정서적 동기가 있지만, 구체적인 독자가 있다는 차이점을 띤다. 일기와 편지를 쓴다는 것은 바깥세계에 대한 원망이 있다는 것이다. 그에 대한 복수심으로 자신의 질서를 찾아 글을 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보편적인 동의와 공감을 얻길 원한다. 그러나 그 전에 작가로서 인정을 받을 수 있도록 사회적 장치인 신춘문예 등에 작품을 투고한다. 그것의 성패가 일차적 싸움이 된다. 공인과정을 거친 작가는 사회적 책임을 지닌다. 그런데 여기서 모순되는 점은 바깥세계에 대한 복수심으로 시작한 글이 사회의 도덕에 이바지해야 한다는 점이다. 」지욱은 이처럼 솔직한 자기고백을 들어 본 일이 처음이라 그의 정직성에 대해 더욱 궁금해졌다. 보통 작가들은 현실의 삶을 취하여 인간 일반의 삶의 진실을 뽑아내지 않던가! 마치 뽕잎을 명주실로 둔갑시키듯 말이다.「언젠가 ‘작가가 왜 쓰느냐’라는 문제에 관해 선배문인에게 추궁을 당한 적이 있다. 평소 생각한 대로 ‘복수심 때문’이라고 답했지만 명쾌한 답변이 아니었다. 그가 물은 것은 모든 것을 포용하는 문학 행위의 이유였다. 이에 대해 한동안 고심하다 ‘복수심과 지배욕의 관계’를 얻어냈다. 첫 째, 복수심이 내면의 수동적 감정 반응이라면 지배욕은 그 복수심을 실현해내려는 구체적 수단으로서의 의지이다. 둘 째, 복수심 자체는 파괴적 정신 질서라면 지배욕은 창조적 생산 질서이다. 이를 통해 복수심과 지배욕간의 반성을 꾀하였고, 긍극적인 문학의 동기는 지배욕이라는 것을 알았다. 지배하기 위해 쓰는 것이다. 그러나 독자와 작가는 지배의 관계가 아닌, 화해의 관계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화가 중요하다. 작가가 내보인 새로운 세계에 독자들의 승인을 기다린다, 다음으로는 작가가 작품으로 행사하는 지배력의 핵심수단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다.」지욱은 강연의 내용에 대해 충분한 설명을 들었지만 오히려 남은 내용으로 인해 불안해하고 있었다. 다 된 밥에 재를 뿌릴까봐서다.「작가는 지배하기 않기 위해 글을 쓰지만 독자의 반발이 없어야 한다. 삶의 진실이란 우리를 더 풍족하고 사람답게 만들기 위한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으로 그런 삶을 위해 싸우는데 이를 배척할 독자는 없을 것이다. 결국엔 진실의 크기나 깊이가 문제이다. 그렇다면 진실은 무엇이고 질서는 무엇인가. 어떤 평론가는 우리 삶을 삶답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들을 ‘억압’하는 것들이라 표현한 바 있다. 우리를 온전한 삶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은 자유의 질서이며 자유의 질서는 우리 삶의 가장 큰 진실이다. 그렇다면 작가의 시점이나 시선이라는 것도 결국엔 그 자유의 이해에 대한 정체가 밝혀질 수 있지 않을까. 작가의 시선에 따라 그의 문학세계의 방향이 결정 된다. 결론적으로 작가는 세계를 지배하려는 욕망에서 글을 쓰기 시작했으나 작가라는 공적의 자리에서 책임을 수행해야 한다. 그 관계가 이율 배반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이는 삶의 진실에 관계된 자유의 질서라는 점에서 해소될 수 있다. ‘새로운 질서의 창조와 확대’에 대해 더 생각해 보자. 이는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어 온 세계에 대해 삶의 질서를 부여하고 더 넓게 보는 것이다. 보다 많은 자유를 누리고 가능의 세계로 나아가는 작업이다. 그러므로 문학이란, 우리 삶의 자유와 관계될 수 밖에 없으며 그 때문에 씌어지는 것이다. 작가는 인간다운 삶, 행복한 삶을 위해 글을 쓰고 있으며 앞으로도 써야만 한다.」
    인문/어학| 2016.04.28| 2페이지| 2,000원| 조회(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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