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를 뒤따라 서북군의 풍옥상(5월), 송청원(10월), 제5로군 총지위 당생지(12월) 등이 잇달아 반장의 깃발을 내걸었다. ... 강소에만 미칠 뿐이고 그 가운데서 안휘, 강서의 수입은 중앙에 들어오지 않는다.](1929년 1월)고 보고하고 있는 것처럼, 나머지 각성의 세수(稅收)는 모조리 장학량, 염석산, 풍옥상
풍옥상, 장작림, 단기서는 북경정부의 공백을 메우기 위하여 단기서를 임시집정(執政)에 앉히는 한편 손문의 북상을 요청하였다. ... 직봉양군은 산해관 부근에서 격전을 전개하였으나 직예군의 풍옥상(크리스찬 제너럴로 불리웠음)이 돌연 반기를 들어 북경을 점령하고 대총통 조곤을 감금하니, 이를 계기로 하여 직예군을 붕괴하게
이를 계기로 풍옥상과의 싸움을 비롯한 두 번째 전정당간의 통일 전선이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 앞에 선 각 당파와 각 계층 간의 통일전선이라고 설파하였다. ... 이는 곧 지방군벌의 세력기반 해체를 의미했기 때문에 3대 세력이었던 이종인, 풍옥상, 염석산 모두 크게 반발한다. 장개석을 포함한 4명의 세력들은 곧 전투로 발전한다.
봉천파가 연합해 풍옥상과 싸우는 혼전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 한편, 직예파가 봉천파를 공격하면서 시작된 정쟁의 와중에서 풍옥상의 부추김을 받은 봉천파 안의 장군이 봉천파 수령 장작림에 반기를 들고 풍옥상이 국민당과 가까워지자, 위기를 느낀 직예파와 ... 반동시기 2)계파 계보상 북양계, 비북양계 지역상(군벌의 출신지에 따름) 봉계 장작림, 환계 단기서, 직계 풍국장과조곤, 진계 염석산, 전계 당계요, 계계 육영정 인물중심 풍계, 풍옥상
이 밖에 직예파 군벌은 영국, 미국 등의 지원을 받았고, 풍옥상은 소련의 지원을 받았다. ... [제1차 직 · 봉 전쟁] 중국 군벌 장작림의 봉천파와 오패부 · 조곤 · 풍옥상 등의 직예파가 북경 정권의 패권을 다툰 군벌전쟁. ... 이번에는 직예파의 풍옥상이 배반하여 봉천파에 가담함으로써 봉천파는 북경 진출에 성공하였다. 여기서 패한 오패부는 허난 성으로 도망쳐 물러나고, 대총통 조곤은 사임하였다.
북방의 풍옥상의 국민군도 이에 호응하였다. ... 그러나 1924년 다시 힘을 기른 장작림의 반격으로 제2차 직봉전쟁이 발발, 예상치 못한 풍옥상의 배반으로 베이징 정부 실권을 내주게 된다. - 풍계: 풍옥상은 중화민국의 군인으로 ... (제1차 봉직전쟁奉直戰爭) 그 결과 북경의 정권은 직계 풍옥상의 쿠테타로 직계 정권이 무너지고 단기서가 임시집정(臨時執政)으로 복귀하였다.
또한 반공으로 돌아선 무한 측과 남경 측과의 실제적인 타협의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양측의 통합을 주장했던 풍옥상은 무한의 분공을 계기로 여러 차례 양측에 통전을 보내 남경과 무한 사이의 ... 이에 대하여 무한 측의 왕정위, 담연개 등이 7월 24일 풍옥상에게 회답을 보내 평화적 통합과 남경으로의 천도에 동의하였고, 이어서 8월8일에는 남경 측의 장개석, 이종인 등이 연락을
부추김을 받은 봉천파 안의 장군이 봉천파 수령 장작림에게 반기 -풍옥상이 국민당과 친해지자 직예파와 봉천파의 연합 VS 풍옥상 -1926년 북방군벌의 혼전을 틈타 장개석의 국민혁명군이 ... 명분을 빼앗아 선후회의 소집 -헌법을 기초할 위원회를 뽑고 국민대표회의의 조직대강을 만들었지만 단기서는 북방군벌 간의 대규모 전쟁을 막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함 4.혼전 전개 -풍옥상의
편견회의의 결과를 실행에 옮기기 위한 남경 ‘전국편견실시회의’ 개최(1929년 8월) - 풍옥상과 염석산이 불참 - 각 편견구의 군대 수를 7 내지 9사로 하고 전국의 군대 총수를 ... 1929년 전개된 지방군벌들과 장개석 사이의 전쟁 -① 초기 : 1929년 3월 광서계 군벌과 중앙군과의 전쟁 → 평정, 이종인등 광서계 수령들이 하야 -② 광서계 패퇴후 풍옥상이 ... 장개석 토벌 선언 → 부하들이 매수되어 실패, 연금 당함 -③ 풍옥상계 송철원이 반장전쟁 → 섬서로 퇴각 -④ 12월 장발규가 광서군과 연합하여 광동을 침입(월계전)하나 격퇴당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