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한 우문술에게도 사자를 보내어 영양왕이 황제에게 항복을 할 것이라는 거짓 정보를 흘렸다. 우문술은 우중문을 설득하여 요동으로 퇴각할 것을 지시했다. ... 을지문덕은 우문술의 군사가 굶주린 기색이 있는 것을 보고 지치게 하기 위하여 싸울 때마다 달아나기만 하니 이로 말미암아 우문술과 휘하의 장수들은 하루 사이에 일곱 번 싸워 다 승리하였다 ... 수 양제는 크게 노하여 우문술 등을 쇠사슬에 묶어 가지고 돌아갔다. 4.
휘장으로 완성해 우문술에게 바쳤다. ... 정흥견우문술득총 곡의유미 특구집진주 락성보장 봉헌여술 曲意逢迎[q? ... yi feng ying]① 자기의 뜻을 굽혀서 남의 의견에 영합하다 ② 갖은 방법으로 남에게 아첨하다 운정흥은 우문술이 총애를 얻자 갖은 방법으로 아첨해 특별히 진미를 구매해 보배
약진착삼분주흥 변여술공박 술양위불승 파정이등실수수거 양약은 조금 술 흥분에 틈타 곧 우문술과 같이 도박해 우문술이 고의로 이기지 못하고 솥과 제기등을 숫자대로 져서 줘 버렸다. ... nyu]쿤룬산(崑崙山)에서 나는 미옥(美玉) 우문술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이는 조금만 진귀한 노리개인데 어찌 족히 희한하겠습니까? ... n]① 교환(交歡)하다 ② 성혼(成婚)하다 ③ 같이 즐기다 ④ 성교(性交)하다 우문술이 귀에 대고 말했다. “공께서 이 물건은 제가 보내준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을지문덕은 다시 사람을 보내 거짓으로 항복하고 우문술을 향하여 말을 전했다. “공께서 만약 군사를 돌리시고 고원이 행재소에 조회를 오게 받드십시오.” 述見士卒疲? ... 자조지모 술칠전칠첩 시승취교 수동도살수 거평양성삼십리 인산위영 아침부터 저녁까지 우문술은 7번 싸워 7번 이겨 승리를 믿고 곧 교만해 곧 동쪽으로 살수를 건너려 하니 평양성에서 30리 ... 술견사졸피폐 불가부전 우견평양성험고난하 권시윤허 인군서환 우문술은 사졸이 피폐함을 보고 다시 싸우지 못하고 또 평양성의 험고해 함락이 어려움을 알고 임시로 허락해 군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영양왕 23년(612) 수나라 양제가 우문술? ... 그 후 우중문과 우문술이 후회하고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올 때, 을지문덕은 하루에 적과 7전을 하였으나 늘 거짓 패하며, 적군을 평양성 북쪽 30여 리 지점까지 유인하였다. ... 양제 때 좌익위 대장군으로 옮겨 문무의 선사를 맡았으며, 612년(고구려 영양왕 23) 수 양제의 제2차 고구려 원정 때, 우문술과 함께 30만 육군을 이끌고 쳐들어왔으나 그해 7월
우문술 등 살아남은 장수들은 모두 작위가 박탈되고 서민으로 강등되었다. ... 그래서 우중문과 우문술의 30만 별동대의 운명은 이미 정해진 것과 다름 없었다. ?5. 전쟁의 결과 ? ... 우문술은 을지문덕도 놓쳤고 식량도 다 떨어져서 돌아가려고 했지만, 우중문은 성을 내며 계속 나아갈 것을 주장하였다.
적진으로 가다(p.150-162) 을지문덕은 우문술에게 편지를 쓰고 왕에게 적군에 들어가겠다고 했다. ... 이를 듣고 우중문은 문덕이 오지 않을 것이라 하고 우문술은 올 것이라고 했다. 그 때 문덕이 오고 그들은 사신으로 접대하기로 했다. ... 이에 우문술이 허락해 얼른 보고서 군영을 빠져 나왔다. 수나라 군사들은 자신들이 너무 안이하게 대했다며 녹족 형제를 시켜 문덕을 잡아오게 했다. 4.
우중문과 우문술은 겨우 혈로를 뚫고 달아났다. 그들이 요동에 가서 군사를 세어 보니 2천 7백명 밖에 안되었다. ... 군의 가장 정예한 병사들만 뽑아 30만 8천명 대군을 조직하고 가장 신뢰하는 우문술과 우중문에게 맡겨 즉시 출발하라고 명령하였다. ... 자신의 판단과 부주의로 수나라 전략 중 중요한 수군의 병사를 잃은 내호아, 병사들이 배고픔에 지쳐있을 때 차선책을 생각지 않고 진군해 나아간 우중문과 우문술의 무능력함이 수나라가 패전국이
우중문과 우문술은 을지문덕을 놓치고는 내심 불안해 있다가 우문술이 식량이 거의 바닥이 났으니 다시 요동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 즉시 우문술(宇文述), 우중문(宇仲文) 등이 거느리는 총 9군, 30만 5천 명의 별동부대가 편성되고, 그들에게 록강을 건너 아군진영으로 돌아왔다. ... 즉 을지문덕은 다시 우문술에게 사자를 보내, 만약 장군이 군사를 돌려 물러가면 고구려왕을 받들고 황제가 있는 곳으로 찾아뵙겠다고 하며 거짓 항복의 뜻을 전한다.
이와 동시에 우문술의 진중에도 사자를 보내어 항복의사를 밝혔다. 우문술은 애초에 추격전을 반대했는데 고구려의 항복 서신에 체면은 세웠다고 판단하고 혼자서 철군 결정을 내렸다. ... 그것이 우문술과 우중문이 이끄는 30만 명의 별동대였다. 그들은 정예병이였지만 각자가 각종 무기와 100일 분량의 식량을 지급받아 짊어지고 가기란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였다.
사마온공의 통감고이에 내호아가 양식배를 잃지 아니했더라면 우문술의 살수의 패전이 없었을 것이라고 하였으니 대개 옳은 말인가 한다. ... 이에 수나라군은 우중문(于仲文)·우문술(宇文述) 등을 지휘관으로 한 30만 5000명의 별동대를 편성하여 평양성 30리 지점까지 진군하였다. ... 전보 같은 것이 없던 고대이므로 우문술 등은 내호아가 패전한 것을 까맣게 모르고 내호아가 오기를 기다려서 함께 공격 하려고 성 안에서의 요구를 승낙하고 성 부근에 진을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