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서 관군과의 전투에 승리한 유인석은「재격백관문」을 발표하여 사민들에게 의병의 당위성을 밝혔다. ... 그러나 12월 12일(양, 1896년 1월 26일) 도망갔던 제천 군수 김익진이 관군을 이끌고 제천에 들어왔으며, 안승우는 이를 피해 강원도 일대를 이진(移陣)하였다. ... 그는 사퇴 사유를 안동부 접수 직후였던 1895년 12월 관군과의 전투에서 패한 것을 들었으며 이후 권세연의 후임으로 김도화가 선출되었다. 그는 체제를 정비한 후 풍기? 순흥?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일본군, 관군과의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대패를 하고 만다. ... 다시 말해, 황토현 전투는 농민군과 관군과의 전투에서 공식적인 첫 번째 승리이며, 이 전투가 동학농민군이 세력을 확대해 나가는 계기가 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 황토현 전투는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이 고부관아를 점령한 것에 대해 이를 토벌하기 위해 황토현에 진을 치고 있던 전라감영의 관군을 새벽에 기습 공격해 대승한 장소라고 한다.
이를 알게 된 전라감사 김문현은 관군을 소집하게 되고, 황토현에서의 전투가 발생하게 된다. 그 결과 농민군이 크게 승리하게 되고, 이것이 1차 동학농민운동의 중요한 전기이다. ... 공주에서 농민군은 1차로 일본군과 관군에게 습격을 받아 처참히 총살당했고, 이후, 우금치 등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유리한 위치와 화력을 가지고 있던 일본군에게 농민군은 처참하게 패하고
황석영, 『장길산』 中 에서는 관군에 의해 구월산 토벌이 벌어지고 있으며 관군에 둘러싸인 마을 안에서는 주민들이 혼란스러워하는 장면이 나와 있는데 이것이 집필된 당시 현실에서는 광주민중항쟁이 ... 모두가 잠잠하였다, “관군은 처음부터 방화하고 살육하며 이 마을을 급습하였네. 우리를 양민으로 여긴다면 그러지 않았을 게야.” “좋소, 끝까지 싸우다가 죽읍시다.”
이에 농민군은 청, 일 양국이 침입할 것을 염려하여 폐정개혁안 실시를 조건으로 관군과 화약을 맺고(1894년 6월 10일) 전주성에서 철병하였다. ... 이에 조선 상인들은 동맹철시와 구매거부 등 저항 운동을 전개했으나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고, 오히려 일본 주도의 화폐경제체제가 굳혀지면서 상업과 관군의 강경진압에 항거한 전봉준은 1894년 ... 그리고 4대 강령을 정한 뒤, 관군과 황토현에서 싸움을 벌여 승리했으며 정읍, 고창 등을 점령하고 이어서 홍계훈(洪啓薰)을 초토사로 한 경군(京軍)마저 장성에서 격파하며 전주성에 입성하였다
옆 진영의 관군도 화살이 다해 투석전을 폈는데, 이때 부녀자들까지 동원되어 관민이 일치단결해 싸웠다. ... 성 안의 관군이 소지한 무기는 궁시·도창 외에, 변이중이 만든 화차, 권율의 지시로 만든 수차석포라는 특수한 무기가 있었다. ... 성 안의 관군도 이 사실을 알아차리고 적을 추격해 130급을 베었다. 그리고 파괴된 내성도 급히 보수하였다. 적군은 퇴각하면서 사방에 흩어진 시체를 불태웠다.
관계가 있는 ‘白波賊’이 또 반란을 일으켰었고, 散瞳 방면에서는 靑州와 徐州에 황건적이 관군을 몰아내고 승리를 해서 또 나라가 전란과 무질서 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 이렇게 관군과 의병의 활약으로 공식적으로 황건적의 난이 종언 되는데, 여전히 황건적의 여파는 남아있어서 각 지방에서 소규모의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188년에 이르러서는 황건적과
그러나 이 같은 항일투쟁은 항일에 앞장서야할 정부가 관군(官軍)을 풀어 이들을 토벌하는가하면, 의병부대의 훈련과 화가 등의 장비가 보잘것없이 오래 계속되지 못하고 해산되었다. ... 김상기는 이를 문석봉이 회덕관아를 공격하여 무기를 탈취한 후 관군과 직접적인 전투가 있었던 구체적인 사실을 논증하여 문석봉의 회덕의병이 을미의병의 효시임을 밝혔다. 2) 북한에서의
조선의 관군은 일본의 기습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하다 금새 서울과 평양을 차례로 함락당했다. ... 당시 조선의 관군은 활을 무기로 사용하였으나 일본은 조총으로 무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조선에는 매우 불리한 싸움이었으며 전력에서도 엄청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