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하자 기상과 도량이 넓고 크고, 지혜와 용맹함이 뛰어났으며, 태조를 따라 백제(百濟)를 정벌하여 공을 세웠다. 2년간 재위하였으며, 향년 34세였다. ... 고려의 2대왕인 혜종은 기상과 도량이 넓고 크고, 지혜와 용맹함이 뛰어났다고 설명이 되었고요 아버지인 태조를 따라 백제(百濟)를 정벌하여 공을 세웠다고 하였습니다. ... 어머니는 장화왕후(莊和王后) 오씨(吳氏)이며, 후량(後梁) 건화(乾化) 2년 임신(912)에 태어났다. 오씨가 일찍이 용이 품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동국사략에는 고구려의 백제 침입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을 하였습니다 고구려(高句麗)는 고국원왕(故國原王) 말년에 이르러 비로소 백제(百濟)를 침공하였다. ... 기준의 후손이 마한 전체의 우두머리[總王]가 되어 대대로 지켜 오다가 백제(百濟) 왕 온조(溫祚)가 한강(漢江) 이남에 도읍을 정하니 한강 남쪽 100리 지역을 분할하여 주고, 삼한 ... 기자(箕子)가 동쪽으로 온 이후로 1131년이 지나서 나라가 끊겼으며, 지금의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 기씨(奇氏)는 모두가 기자의 후손이다.
《통지(通志)》의 씨족략(氏族略)에 나오는 ‘부유씨(鳧臾氏)’는 백제(百濟)의 부여(夫餘)인데 음이 변하여 부유로 된 것이다. ... 그러나 부여는 구려(句麗)와 백제(百濟)가 일어난 곳이기에 특별히 똑같은 예로 기(紀)를 둔다. ... 색리왕(索離王)이?살펴보건대, 색(索)은 혹 고(?)로도 되어 있다.?출행(出行)하였었는데, 시아(侍兒)가 그 뒤에 임신하였다.
제 29대 춘추왕(春秋王)은 당(唐)에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를 평정하였다네. 김유신(金庾信)은 공신(功臣)으로, 신묘한 병서를 얻어 무예에 정통하였도다. ... 혹 계림(鷄林)에 감응하기도 하고, 혹 금궤에 감응하기도 하였으니, 석씨(昔氏)와 김씨(金氏)가 서로 이어졌도다. ... 알 속에서 오랫동안 자랐으므로 성을 박씨(朴氏)로 하였으니,신라인들은 표(瓢)를 박(朴)이라고 하였다., 이 어찌 하늘에서 계시(啓示)한 것이 아니겠는가?
한사군(漢四郡)과 이도독부(二都督府)의 시대를 지나서 백제(百濟) 온조왕(溫祚王) 26년 무진년에 망하였으니, 이것이 또 1백 40여 년이다. ... 또 이르기를, “단군이 아들 부루(扶婁)를 낳았으니, 이가 동부여왕(東扶餘王)이 되었다. ... 단씨(檀氏)가 서로 대를 전하여 나라를 이은 햇수가 1천 48년인 것은 의심이 없다.
제 29대 춘추왕(春秋王)은 당(唐)에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를 평정하였다네. 김유신(金庾信)은 공신(功臣)으로, 신묘한 병서를 얻어 무예에 정통하였도다. ... 혹 계림(鷄林)에 감응하기도 하고, 혹 금궤에 감응하기도 하였으니, 석씨(昔氏)와 김씨(金氏)가 서로 이어졌도다. ... 알 속에서 오랫동안 자랐으므로 성을 박씨(朴氏)로 하였으니,신라인들은 표(瓢)를 박(朴)이라고 하였다., 이 어찌 하늘에서 계시(啓示)한 것이 아니겠는가?
제 29대 춘추왕(春秋王)은 당(唐)에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를 평정하였다네. 김유신(金庾信)은 공신(功臣)으로, 신묘한 병서를 얻어 무예에 정통하였도다. ... 혹 계림(鷄林)에 감응하기도 하고, 혹 금궤에 감응하기도 하였으니, 석씨(昔氏)와 김씨(金氏)가 서로 이어졌도다. ... 박혁거세는 알 속에서 오랫동안 자랐으므로 성을 박씨(朴氏)로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신라의 건국 신화는 전형적인 난생신화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지나(支那)의 한(漢)나라가 조선(朝鮮)의 땅을 나누어 군현(郡縣)을 설치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 신라,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삼국(三國)이 나란히 흥기하여 솥발[鼎足]의 ... 유례왕(儒禮王)과 기림왕(基臨王)은 모두 조분왕의 후손으로 왕위를 이었고, 내해왕(奈解王)의 손자 흘해(訖解)가 왕위를 이었다가 죽으니 이때부터 석씨(昔氏)의 혈통이 단절되었다. ... 주몽이 북부여(北扶餘)에 있을 때에 예씨(禮氏)에게 장가들어 유리(類利)를 낳았다.
《통지(通志)》의 씨족략(氏族略)에 나오는 ‘부유씨(鳧臾氏)’는 백제(百濟)의 부여(夫餘)인데 음이 변하여 부유로 된 것이다. ... 그러나 부여는 구려(句麗)와 백제(百濟)가 일어난 곳이기에 특별히 똑같은 예로 기(紀)를 둔다. ... 색리왕(索離王)이?살펴보건대, 색(索)은 혹 고(?)로도 되어 있다.?출행(出行)하였었는데, 시아(侍兒)가 그 뒤에 임신하였다.
신라, 駕洛(가야)과 새롭게 연결되면서 오게 된 변화이다. ① 北 : 三朝鮮(단군-기자-위만) → 4郡 → 2府 →高句麗 ② 南 : (단군-기자) → 三韓(마한-진한-변한) → 百濟 ... 고조선과 같은 시기에 병립했던 역사적 실체로 상정하여 양자 병립의 이원적인 고대사체계를 구축하였다. ① 北 : 朝鮮 → 四郡 → 高句麗 → 渤海 ② 南 : 韓國(辰國) → 三韓(馬韓→百濟 ... 곧 韓氏를 冒姓하여 한 部를 이루고 箕氏의 제사를 모셨다고 하였는데, 이를 두고 평양(高句麗)에 마한이라는 이름이 있게 된 연유라고 하였다.
왕씨의 조흥(肇興)은 태봉(泰封)으로부터 일어나 신라(新羅)의 항복을 받고 후백제(後百濟)를 멸망시켜 삼한(三韓)을 합하여 한 집으로 만들었으며, 이후 요(遼)를 버리고 〈후〉당(唐 ... 본기(本紀)라는 말을 피하여 세가(世家)라고 한 것은 명분(名分)의 중요함을 보이려는 까닭이며 위왕(僞王) 신씨(辛氏)를 열전(列傳)으로 내린 것은 그들이 참람하게도 왕위를 도적질한 ... 충렬왕(忠烈王)은 연회를 열며 간신 무리와 어울리다가 결국 부자간에 서로 불화를 얽었으며, 또한 충숙왕(忠肅王) 이래로부터 공민왕(恭愍王)의 치세에 이르기까지 변고가 자주 일어나 쇠미해짐이
百兵宜供供侯王□□□□作 [뒷면]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世□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世 간 마사토모는 칠지도가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의 실체를 뒷받침해 주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 성씨를 부여씨(扶餘氏)로 하였다. ... 마지막으로 온조 시조 신화에서는 온조가 정착한 후에 미추홀에 자리잡았던 비류가 죽자 온조는 그의 세력을 흡수하였고, 국호를 백제(百濟)로 고쳤으며, 그 근원이 부여 에 있다 하여 스스로
진긍은 대방현(帶方縣)출신으로 이곳은 후백제(後百濟)의 아래에 있었던 곳이다. 이런 배경은 그가 기존세력과는 동일한 입장이 아니라는 것을 추측하게 한다. ... 광종의 부인이 되는 대목왕후 황보씨(大穆王后 皇甫氏)는 태조의 부인인 신정왕태후 황보씨(神靜王太后 皇甫氏)의 딸로써, 신정왕태후의 또한 경종의 입장에서 광종이 후하게 대한 자신의 종친을 ... 왕순식의 부친 왕허월(王許越)이 지금 중이 되어 내원(內院)에 있는바 그를 파견하여 개유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니 태조가 그 말을 쫓았다. - 『高麗史』券92, 列傳5, 王順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