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 상차(上箚))·상소(上疏) 및 지방관의 장계(狀啓))와 그에 대한 비답(批答))·전론(傳論)·하론(下論) ⑦ 기타 임금에게 보고되는 사항 : 사은(謝恩)·숙배(肅拜))·현고(現告 ... 훨씬 광범하여 인조~영조(英祖) 망기(備忘記))·교문(敎文)·교서(敎書) 등 ⑤ 이(吏)·병조(兵曹)의 정주(政注))나 개정(開政))·궐정(闕政)) 관계 ⑥ 관인(官人)이나 유생(儒生 ... 壽宴)) 등 각종 궁중 연회 행사 ⑨ 신료 인접(臣僚 引接) : 경연(經筵)·약방(藥房)·차대(次對))·청대(請對))·소대(召對))·인대(引對)·상참(常參))·윤대(輪對))·유생(儒生
이때 다수의견이 상소(上疏)의 의견이 되고, 소수의견의 상소는 허용되지 않는다. ... 이는 사학유생(四學儒生)과 외방유생(外方儒生)도 마찬가지였다. ... 즉 유생의 상소(上疏)는 오도의 성쇠와 종사의 안위의 문제에 대하여 의견을 개진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관학소는 구체적인 국정?형정의 문제는 대상으로 할 수 없었다.
顥忍無可忍),復上疏極言,略云: 호인무가인 부상소극언 략운. 정호는 참으려고 해도 참을 수 없어서 다시 상소로 극도로 말하니 대략 다음과 같다. ... i)이다. )왕망: 유능한 정치가이자 독실한 유생(儒生)이었으며, 그당시의 모든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미신을 믿는 일종의 현학자(衒學者)였다.
이러한 시기에 불교의 인적(人的),물적(物的) 제한을 청하는 상소(上疏)가 있었다. 이들의 의도는 당시의 국가의 재정적 어려움을 불교의 재원(財源)을 제한하기를 청하였다. ... 하여 조선사회에서의 관학유생의 역할과 사림 공론정치에 있어서의 관학유생들의 사회적 자치활동의 영향을 살펴보고자 하는데 그렇다면 지금부터 조선시대(朝鮮時代)의 성균관(成均館) 유생(儒生 ... 유생들은 종래의 의견 교환 수단으로 이용하던 통문을 사림의 輿論을 환기시키고 勢를 확충하는 방법으로 이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④ 유생공천(儒生公薦) 관학유생들은 재회를 통하여 관리가
효종 즉위년 12월에 館學儒生 洪? 등 수백 명이 李珥와 成渾의 文廟從祀를 청하였다. 이에 대해 柳稷을 疏頭로한 嶺南 儒林 900여명이 反對上疏를 하였다. ... 이러한 집단행동에 불참하면 동료 儒生들로부터 많은 불이익을 받았으며, 시위의 규모에 따라 처벌이 뒤따르기도 하였고, 儒生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서로 분열되기도 하였다. ... 削籍은 儒生의 소위이니 朝家에서 간여할 것이 아닙니다. 라고 하였다.
즉 성리학에 철저한 재야의 儒生들은 衛正斥邪運動을 전개하였는가 하면, 開化思想家들은 서양의 사상과 제도를 적극 수용하여 하루빨리 부국강변을 이룩하여 부강한 나라를 건설하려고 하였다. ... 그들은 斥邪上疏가 통하여 대원군의 洋夷政策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해 주고 있었다. 그 대표적 인물었지만 그는 분별력이 없는 인물이었고, 주모자는 前刑曹參議 安驥泳이었다.
그는 人材따르던 成均館 儒生 李若水 등 150여명이 대궐안에 들어와 上疏하고, 閤門 밖에서 통곡하면서 趙光組의 무고함을 논하고, 또한 大司諫 尹希仁 등도 조광조는 나라를 위해 일한 ... 게다가 成均館 儒生 林鵬 등 240여명이 趙光組의 억울함을 아뢰고 옥에 함께 갇히기를 청하자, 中宗은 젊은 사람이 옛글만 읽어서 事體를 모르고 政事를 날로 위태롭게 하였다면서, 이들을 ... 죽이자는 청이 없어서 결단을 못 내리고 있던 차에, 生員黃李沃, 幼學 尹世貞·李來 등이 趙光組를 죽여서 생살여탈의 권한이 임금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 주어 기강을 확립해야 한다는 上疏
그는 人材를 선발함에는 詞章이나 門閥의儒生 李若水 등 150여명이 대궐안에 들어와 上疏하고, 閤門 밖에서 통곡하면서 趙光組의 무고함을 논하고, 또한 大司諫 尹希仁 등도 조광조는 나라를 ... 게다가 成均館 儒生 林鵬 등 240여명이 趙光組의 억울함을 아뢰고 옥에 함께 갇히기를 청하자, 中宗은 젊은 사람이 옛글만 읽어서 事體를 모르고 政事를 날로 위태롭게 하였다면서, 이들을 ... 죽이자는 청이 없어서 결단을 못 내리고 있던 차에, 生員黃李沃, 幼學 尹世貞·李來 등이 趙光組를 죽여서 생살여탈의 권한이 임금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 주어 기강을 확립해야 한다는 上疏
그는 유생(儒生)들은 국민의 대표로 인정되고 공론의 제출과 국왕 및 정부의 위정을 개량?수정하는 정치적 자유가 있다고 주장한다. ... 그는 조선 신민이 군권을 제약하면서 정치적 자율성을 행사한 사례들을 궁정회의와 공론에 입각한 여론정치의 발달, 국민대표의 정치발안―상소(上疏) 등―, 그리고 정당정치의 발달 등에서
이러한 黨爭의 양상은 慶曆 3년 8월 仁宗이 范仲淹을 參知政事로 임명하고 그에게 世務에 대한 上疏를 올리도록 하면서 본격적인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 漢代의 宦官과 儒生의 싸움에서 나타난 黨固의 禁이나 唐代의 進士출신자와 非진사출신자의 牛·李의 당쟁, 그리고 明代의 東林派와 非東林派의 싸움 등은 정책을 놓고 싸움을 하였다기보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