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신인 언더우드는 그대로 서울로 들어갔지만 부인과 함께 온 아펜젤러는 1주 일동안 인천에 머물다 일본에 돌아간다. 이들 부부는 6월 20일 다시 인천에 상륙했다. ... 의한, 선각에 의한 개항이었다면 어더했을까 역사의의문점을 제시해 본다. (3) 개신교의 전래, 내리교회 종교집회 한국에 기독교 선교사업을 위해 처음으로 들어 온 선교사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이다
이러한 언론 활동을 펼친 대표적인 선교사는 앞에 교육 활동에서도 나왔었던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그리고 헐버트를 들 수 있다. ... 아펜젤러 목사는 현대식 인쇄소를 설치하고 문서 선교 사업에 힘쓸 것을 결심한 후, 중국 상해에서 선교 사업을 하고 있던 영국인 감리교 선교사 올링거(F. ... ) 이러한 측면의 연구로는 한숭홍, 「초기 선교사들의 신학과 사상」, 『한국 기독교와 역사』1,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1 ; 성백걸, 「웨슬리 신학과 초기 감리교 선교사 - 아펜젤러의
선발하였다.각기 의사와 교사이면서 언더우드와 스크랜턴,아펜젤러는 모두 목사였다.특이한 점은 북장로회와 감리회가 모두 의료와 교육을 통한 간접선교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것이다. ... 기독교가 전래된 시기는 1832년으로 봐야 할 것 같다.이때 로드 암허스트호의 선의(船醫)이며 통역관인 칼 귀츨라프가 성서를 전달했기 때문이다.그 뒤 1885년 4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 자원한 알렌을 한국에 입국하게 했다.그리고 교육선교사로 언더우드를 선발했다.미 감리회도 일본의 매클레이 선교사를 통해 의료와 교육 사업 허락을 받고, 의료선교사 스크랜턴과 교육선교사 아펜젤러를
영어를 배우고 싶으나 관리들의 추천을 받을 수 없는 학생들이 아펜젤러의 사숙을 찾았다. 1887년 봄 아펜젤러의 영어 사숙이 신식학교로 구색을 갖추게 되는 일련의 세 사건이 이어졌다 ... 하지만 아펜젤러는 사망 전까지 약 17년간 원하던 교양교육을 펴지 못하고 선교의 방편으로서 교육에 천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아펜젤러가 학생들에게 개신교 교리를 가르친 것은 아니었으나, 선교사들이 설립한 학교라는 것만으로도 조선인들의 불신은 깊었다.
아펜젤러?언더우드 :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제물포항에 첫 발을 내디딤으로써 개신교의 한국 선교는 새로운 장을 열게 되었던 것입니다. ... 아펜젤러는 1885년 첫 감리교회인 ‘정동교회’를 세우고, 1887년 ‘배제학당’을 창립하였으며, 언더우드는 1886년 2월 정부의 허가를 얻어 고아들을 모아서 가르치기 시작한 ‘언더우드학당
세웠으며, 오늘날의 배재중학교 · 배재고등학교 · 배재대학교의 전신이다. 1885년 7월 서울에 도착한 아펜젤러가, 1개월 먼저 와 있던 W.B.스크랜턴의 집을 구입, 방 두 칸의 ... 1895년 우체사가 설치될 때까지 10년 동안은 다시 구제인 역참에 의한 통신방법이 계속되었다. 1885 배재학당 설립 ▶ 배재학당 - 1885년 8월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인 H.G.아펜젤러가
언더우드관은 언더우드를, 아펜젤러관은 배재학당을 설립한 아펜젤러를 기념하기 위한 건물이다. 4. ... 1924년 건축), 사적 277호 아펜젤러관(1924년 건축)이 있다. 고딕풍인 이들 건물은 전체적으로 단정하면서 아름답다. ... 이 홀의 이름은 아펜젤러의 부탁을 받고 건물 신축에 12만5000달러의 거금을 쾌척한 파이퍼의 이름에서 따왔다. 석조 고딕 건물이며 1935년 준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