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흥왕순수비
- 최초 등록일
- 2008.11.27
- 최종 저작일
- 20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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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 고대사 신라 진흥왕순수비에 관한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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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1816년 두 선비가 북한산을 오른다. 그 둘은 추사 김정희와 그의 친구인데, 북한산에 우연히 놀라갔다가 진흥왕의 비석을 발견한다. 그들로 인해서 1200여년 만에 세상에 그 존재가 알려진 진흥왕의 북한산 순수비. 진흥왕은 나라 곳곳에 비석을 새워두었던 것이다.
진흥왕 때 영토 확장의 증거가 되는 순수비는 북한산 순수비, 창녕 순수비, 황초령 순수비, 마운령 순수비 총 4개이다. 순수(巡狩)란, 황제가 천하를 돌아다니며 천지산천에 제사하고, 지방의 정치 민정을 순찰하던 풍습으로 진흥왕도 이러한 풍습을 따라 신라의 영토를 확장하고 비석을 세운 것이다. 현재에도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는 북한산, 지금 그 곳에 있는 비석은 진흥왕 순수비가 아니다. 그것은 그 곳에 진흥왕 순수비가 있었다는 것을 알리는 안내 비석이고, 진품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진흥왕 순수비는 진흥왕이 경주의 작은 분지에서 국가를 이루고 있다가 영토를 확장한 것에 대한 기쁨과 자부심 등에 인해서 세웠을 것이라고 한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있는 기록을 살펴보면 진흥왕 순수비는 처음에는 무학도사의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다. 그러나 첫 번째 줄에 새겨진 진흥태왕이라는 글자가 그것이 진흥왕이 세운 것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를 제공해 주고 있다. 그것을 추사 김정희가 발견한 것인데 그 기쁨으로 인해 그는 비석 왼쪽에다가 자신이 이 비석을 진흥왕의 것으로 판독했다고 새겨두었다고 한다. 또한 김정희는 ‘남천군주’라는 글자를 판독해 비석의 건립시기까지 밝혀내었는데, 『삼국사기』의 남천주 설치기록과 비교하여 568년 이후에 비석이 새겨졌다고 추정하였고, 이는 지금도 학계에서 정설로 인정받고 있다고 한다. 북한산 순수비는 전경은 좋은 편이나, 비석을 세우기에는 좁고 험한 곳에 세워져 있다. 그 이유는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에 대해 대등한 세력이 되었고, 그들을 물리쳤다는 자부심에 인한 것으로 본다. 신라라는 영남의 작은 국가가 이제는 한반도 중심국가가 되어서 통일을 향해 나갈 수 있는 사건을 기념해서 새긴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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