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복의 사상과 `동사강목`
- 최초 등록일
- 2008.06.28
- 최종 저작일
- 20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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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안정복의 사상과『동사강목』
목차
1. 당시의 시대상과 문제의 제기
2. 안정복의 생애
3. 안정복의 경세관(經世觀)
3-1. 향촌교화론(鄕村敎化論)
3-2. 지방행정론(地方行政論)과 국방론(國防論)
4. 안정복의 경학관(經學觀)
5. 안정복의 역사인식(歷史認識)
5-1.『동사강목』의 편찬
5-2.『동사강목』의 편찬 목적
5-3.『동사강목』의 목차
5-4.『동사강목』의 의례(義例)
5-5.『동사강목』의 국사체계(國史體系)
5-6.『동사강목』에서의 역사고증(歷史考證)
5-7.『동사강목』에서의 지리고증(地理考證)
5-8.『동사강목』의 사론(史論)
5-8-1. 강상도덕(綱常道德)에 관한 사론
5-8-2. 사대교린(事大交隣)과 국방(國防)에 대한 사론
5-8-3. 제도개혁(制度改革)에 관한 사론
6. 「동사강목」, 사료로의 가치평가
7. 맺음말
본문내용
1. 당시의 시대상과 문제의 제기
임진왜란을 거치고 이어 인조반정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조선사회는 반상의 신분질서가 크게 흔들리는 사회변혁을 거치기 시작했다.
양란의 결과, 농경지가 황폐화되었고 조정에서는 묵은 밭의 개간을 적극 장려했다. 이를 기회로 지배층의 대토지 소유가 가능했다. 따라서 대다수의 농민은 토지를 소유할 수 없게 되었다. 17세기말, 18세기 초에는 논농사의 파종법이 종래의 직파법에서 이앙법 대체됨에 따라 노동력을 줄이고, 이모작이 가능해져 벼의 수확량이 배가되었다. 이런 농업생산력의 발전에 기초하여 상품유통관계가 활발해졌다. 특히 대동법의 시행과 숙종4년부터 시작된 화폐의 유통은 상업을 부활시켰다. 상인들은 시장관계가 성숙되어 있지 않다는 사정을 이용하여 치부했고 상호간 경쟁이 치열해지자 수공업자를 예속함으로써 상인자본의 수공업 지배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화폐경제가 활성화되면서 일부 농민은 생산력의 발전과 상품화폐간의 관계를 적절히 이용하여 부농으로 성장해갔다. 또한 계속되는 재정난으로 시달리던 조정과 화폐의 부족에 허덕이던 양반계층은 납속면천(納粟免賤)과 납전면천(納錢免賤)을 제도적으로 장치했다. 이런 신분제 동요의 직접적 표현이 바로 가렴주구(苛斂誅求)와 수탈의 강화였다. 즉 신분제에 의한 강제와 억압이 무력해지자 봉건적 지배층은 경제적 수탈에 의하여 양인층과 노비층을 구속하려 했던 것이다. 이런 신분제의 동요는 양인층과 노비층의 사회의식에 일정한 변화를 초래했다. 즉, 그들은 이전까지 자명했던 봉건적 신분의 권위나, 그 권위에 바탕한 사회적 억압에 대하여 회의를 품게 되었다.
18세기 중· 후반기에는 사회적으로 신분제의 변동이 격심해지고, 사상적으로 남인실학과 북학사상이 성숙해 가던 시기이다. 이와 같은 사회경제적 변동과 사상계의 변화에 수반하여 역사서술상으로도 다양한 역사의식을 반영하는 사서들이 출간되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