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시대의 석실
- 최초 등록일
- 2008.06.06
- 최종 저작일
- 20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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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가야의 석실에 대한 자료입니
목차
Ⅰ.서 론
Ⅱ. 5-6세기 가야지역 석실의 검토
Ⅲ. 횡혈식석실묘의 시기별 변천
Ⅲ. 결 론
본문내용
가야 서남부지역은 고성을 비롯하여 진주, 사천, 산청 등 남해안 일대와 남강유역을 중심으로 다수의 개별 정치체가 연맹 또는 연합의 형태를 이룬 것으로 파악된다. 이를 통틀어 소가야연맹체라고 불려지고 있다. 소가야는 4세기에서 5세기 전반에 시기에는 산청 등 가야 서남부 내륙지역과 남해안에 산재한 다수의 정치체로 이루어졌으나 5세기 중엽 이후 특정지역을 중심으로 결집되는 양상을 보인다. 고성 송학동은 대형 고총(高塚)의 존재와 『三國遺事』,『三國史記』의 기록 등으로 보아 5~6세기 소가야의 중심지였던 것은 확실하다. 이러한 소가야 정치제는 남해안의 해상교역로를 통한 중국, 왜와의 교역을 주도하였으며, 남강과 낙동강을 이용하여 내륙의 가야세력에 물자를 공급하였다.
5세기 후반 이후 가야에는 在地의 정통적인 수혈식석곽(竪穴式石槨)의 축조를 대신하여 횡혈식석실(橫穴式石室)의 도입이 가속화된다. 석식의 도입과 함께 고성을 중심으로 한 소가야지역에서는 분구축조가 선행하는 고총이 출현하거나, 백제 및 대가야 유물이 급속도로 확산되며 倭系문물의 수용이 눈에 뛰게 활발해진다. 또한 6세기로 접어들면서 신라계 유물의 등장도 매우 빈번해지는 변화가 간취된다.
수혈식석관묘 전통에서 횡혈식석실의 도입은 분명 매장관념에 있어서 대단한 변화이다. 단순히 석실의 축조기법만 수용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주가장이 시행되고 있다는 사실은 사회의 이념, 가치관, 생활습관의 총제적인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변화를 해당 지역의 최고 수장층에서 조도하고 있다는 사실은 석실의 도입과 확산과정이 정치적 상황을 여실히 반영한 결과임을 말해준다. 백제의 경우 정형화된 석실의 확산과정이 중앙에 의한 지방지배의 강화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는 것은 대부분 동의하는 사실이다.
가야지역 석실을 분류하여 각 지역에 석실이 수용되는 과정에 대하여 검토해 볼 것이며 석실의 도입에 어떠한 배경이 작용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Ⅱ. 5-6세기 가야지역 석실의 검토
1. 가야지역 석실의 유형분류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