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통감부시기 서울에서의 일본인 증가와 일본인 거류지 확산을 살펴보고, 그로인한 서울시장의 상품 변동을 살펴본 리포트입니다. 통감부시기를 주제로 더욱 소주제를 채택하여 리포트를 작성한 것으로 세밀한 내용까지 담고 있습니다.
목차
1. 머리말.
2. 서울에서의 일본인 증가.
1) 러일전쟁 이후 일본인 급증.
2) 일본인 거류지의 확산.
3. 서울 시장의 상품변동.
1) 소비시장으로서의 성장.
2) 상품구성의 변동.
4. 맺음말.
본문내용
1. 머리말.
개항 이후 서울, 당시의 한성부(漢城府)에 일본인들이 들어와 산 것은 1882년 조선과 청국사이의 한성개잔(漢城開棧) 확정에 따라 가능하게 되었다. 특히 1884년 갑신정변 이후 일본인들은 진고개(충무로) 일대에 자리잡고 일본인 거류지(居留地)를 형성하면서 수표교 일대를 중심으로 자리잡고 활동하던 청국 상인들과 경쟁하였다. 그러나 1894년 청일전쟁 이후 청국 상인들이 물러가면서 일본 상인들은 남대문통 일대로 진출하였고, 이후 본정통(충무로)의 동쪽 지역으로 적극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여 일본군이 서울에 들어오자 이들을 따라서 일본인들이 대거 몰려와 1906년에는 1만명을 돌파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1910년에는 무려 3만명에 달하게 된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인들은 한성부 성내만이 아니라 용산지역으로 적극 진출하였다. 특히 그들은 용산지역에 일본군 병영을 건설하고, 철도관리국을 옮기면서 ‘신용산’으로 불리는 그들만의 시가지를 만들었다.
1910년 당시 한국에 거주하던 일본인 가운데 가장 수가 많은 곳은 서울이었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정치적 우세와 경부선 개통으로 서울은 부산, 인천, 원산의 개항장 보다 많은 일본인 거류지를 형성할 수 있었다. 특히 1908년을 기점으로 서울의 일본인 인구가 부산의 일본인 인구를 앞질렀으며, 부산과 인천, 원산의 인구가 소폭 증가 혹은 감소 추세를 보였던 것에 비해 서울의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그 결과 1910년 당시 한국 거류 일본인의 20.1%에 해당하는 34,468명이 서울에 거주하였다.
이처럼 러일전쟁 이후 통감부시기에 서울에서의 일본인 거주자 수가 증가함으로써 인천의 시장권에 편입되었던 서울시장은 전국적인 상업중심지로서 지위를 갖게 되었다. 또한 서울시장에서 거래되었던 상품의 구성도 일본인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일본인의 기호(嗜好)에 맞게 변화되기 시작하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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